어두운 저주의 시간들을 투명한 축복의 시선으로 관통해내는...
“배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밖에서 배우는 것과 안에서 배우는 것. 흔히 사람들은 전자를 최선, 나아가 유일한 방법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장거리 여행, 혹은 보고 읽는 것을 통해서, 아니면 대학 교육이나 수업을 통해서 배움을 얻는다. 존재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뭔가를 습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배워야만 한다. 그렇기에 꿀벌처럼 부지런히 지식을 모아서 그것을 자신에게 덧붙여나가고, 그렇게 지식이 쌓이면 그것을 활용하거나 가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에 도사린 ’어리석음‘, 다시 말해 학습을 필요로 하는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크워스카는 외부의 것을 내면으로 동화시키면서 세상을 배웠다.
쌓이기만 하는 지식은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단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겉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는 사람은 끝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존재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pp.18~19)
얼마전 후배가 두 권의 소설을 추천했다. 그중 한 권은 장혜령의 《진주》였는데 나름 유니크 하였으나 호들갑스러울만치는 아니었다. 다른 한 권이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인데, 이 책은 더욱 떠들썩하게 소개하여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노벨 문학상이라는 타이틀과는 무관하게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작가의 소설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흔 살 이전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미시아는 여느 다른 인간들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조각조각 나뉘어 태어났다. 보는 것, 듣는 것, 이해하는 것, 느끼는 것, 감지하는 것, 경험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안에서 제각각 분리되어 있었다. 앞으로 미시아의 전 생애는 이것들을 온전하게 하나로 결합했다가 다시 부서뜨리는 데 할애될 것이다.” (p.49)
소설은 20세기의 폴란드라는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토대로 하여, 거기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과 동물과 신과 죽은 자와 죽었으나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이와 천사와 나쁜 인간과 동물과 사물이 발생시키거나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과 소비에트에 의한 공산화와 이후 지속되는 냉전 체제 그리고 노조에 의한 민주화 운동과 사회주의 몰락까지 20세기의 폴란드가 소설에 담겨 있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따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들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p.52)
소설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게노베파와 남편인 미하우에서 시작되는 니에비에스키 가족의 시간들이다. 게노베파는 미시아와 이지도르를 낳고, 미시아는 파베우와 결혼하여 아델카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는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태고의 지주인 포피엘스키의 시간이다. 소설에서는 그가 진행하는 게임의 룰을 통해 현대라는 시대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신화의 시간을 설명하고 있다.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한다. 폭격당한 기차의 풍경, 고여 있는 핏물, 매년 다른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버려진 폐가가 그라인더 속에 저장된다. 그라인더는 차갑게 식어버린 인체의 따뜻함과 익숙한 것을 내팽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자신 안으로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라인더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각자의 손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여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는 것이다.” (p.53)
그런가 하면 숲 속에 살고 있는 크워스카와 그녀의 딸 루타의 시간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게노베파가 평민의 시간을 그리고 포피엘스키가 지주의 시간을 대표한다면 크워스카는 그보다 못한 낙오자의 시간을 가리킨다. 크워스카와 루타로 이어지는 이들의 시간은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더욱 참혹할 수밖에 없고, 그들은 태고라는 마을이 아니라 그 곁의 숲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지켜낸다.
“죽음에 대해 학습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 마치 시험처럼 죽음의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자들의 시간 속에 갇히게 된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생을 찬미할수록, 생과 더욱 강렬하게 연결될수록 죽은 자들의 시간은 더욱 혼잡해졌고, 공동묘지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자들은 이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p.264)
이 모든 시간들이 길지 않은 각각의 시간 챕터들에서 샅샅이 다뤄지는데, 태고의 시간,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나쁜 인간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예슈코틀레 성모의 시간, 미하우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미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 교구신부의 시간, 엘리의 시간, 플로렌틴카의 시간, 이지도르의 시간,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보스키 영감의 시간, 파베우 보스키의 시간, 게임의 시간, 집의 시간, 파푸가 부인의 시간, 미시아의 수호천사의 시간, 루타의 시간, 신의 시간, 쿠르트의 시간, 셴베르트 가족의 시간, 이반 무크타의 시간, 파베우의 시간, 아델카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죽은 자들의 시간, 릴리와 마야의 시간, 보리수의 시간, 랄카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손주들의 시간, 넷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시간 등에서이다.
“... 나중에 장례식이 끝난 뒤에 어머니와 함께 상자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오래된 천 조각과 나무 주사위, 다양한 모형들이 들어 있었어요. 동물과 사람, 여러 가지 물건들······. 마치 어린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같았어요.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잔뜩 쓰여 있는 너덜너덜한 책자도 함께 있었어요. 엄마와 나는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탁자 위에 쏟아놓고 찬찬히 살펴보았어요. 그런 유치한 장난감을 아버지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죠. 지금도 그것들이 눈에 선해요. 황동으로 만든 남자와 여자, 동물 피규어들, 나무와 집, 성을 본떠 만든 초미니 모형들, 아, 예를 들면 손톱만 한 크기의 책들과 미니 커피 그라인더, 빨간 우체통, 물지게와 양동이들······. 모든 게 어찌나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pp.319~320)
이 모든 시간들이 결국엔 신이 만들어 놓은 게임 판 위에서나 실행된 것 같다는, 이 길고 긴 시간이 한 바탕 꿈에서의 일인 듯 혼란스럽기만 하다는 작가의 연약한 고백이 소설의 어느 한 페이지에 등장했던 것도 같다. 우리들의 삶이란 때때로 축복이거나 간혹 저주일 수 있는데, 작가는 어두컴컴하고 객관적인 저주의 시간들을 투명하고도 주관적인 축복의 시선으로 그려내고야 말았다.
올가 토카르추크 Olga Tokarczuk / 최성은 역 / 태고의 시간들 (Prawiek I Inne Czasy) / 은행나무 / 379쪽 / 2019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