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시간이란 벽을 뛰어넘어 그 시대와 인물을 향해 직진하도록 만드는 몰입감.

by 우주에부는바람
그레이스.JPG

“하지만 나무를 이루는 삼각형 조각들 중에서 세 개만큼은 다른 색으로 만들 거예요. 하나는 메리 휘트니한테 받은 페티코트의 흰색이 될 테고, 또 하나는 제가 밖으로 나올 때 기념품으로 달라고 간청해서 얻은 교도소 잠옷의 누런색이 될 거예요. 그리고 남은 하나는 분홍색과 하얀색의 꽃무늬 있는 엷은 무명천으로 만들 거예요. 제가 처음 키니어 나리 댁으로 찾아간 날 낸시가 입고 있었고 제가 배를 타고 루이스턴으로 도망갔을 때 입었던 드레스에서 잘라 낸 천으로 만들 테니까요.

저는 삼각형을 뱅 둘러 가며 무늬와 잘 어울리게 빨간 실로 갈지자 수를 놓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겠죠.” (p.323, 2권)


위의 인용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세 개의 문단의 내용이다. 주인공인 그레이스 막스의 입을 빌리고 있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메리 휘트니가 등장하고, 메리 휘트니를 대신해줄 그녀로 여겼지만 결국 이후 그레이스 막스가 영어의 몸이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낸시 몽고메리가 여기에 모두 등장한다. 소설의 챕터 제목으로 퀼트 패턴의 이름이 사용되는데, 이들 세 여인이 소설 전체에 어떤 식으로 정교하게 누벼지고 있는지를 정리하고 있다.


“...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 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p.38, 1권)


소설 《그레이스》는 실제 1843년에 캐나다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30여 년간의 수감 생활을 해야 했던 실존 인물인 그레이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 실제 사건에 크게 흥미를 느꼈는지 소설로 만들기 이십 년 전인 1974년에 <하녀>라는 제목의 극본을 쓴 바도 있다고 하는데, 기본적인 이야기의 양태는 그대로지만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 방에 혼자 있기 싫다. 벽이 너무 휑하다 그림도 없고, 저 위쪽의 조그만 창문에 커튼도 없어서 쳐다볼 게 아무것도 없으니 벽만 보게 된다. 한참 벽을 쳐다보고 있었더니 벽에 그림이 생기고 빨간 꽃들이 피어난다.

내가 잠이 든 것 같다.” (p.54, 1권)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건너와 하녀 생활을 전전하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살인범이 된 여인을 향한 작가의 호기심은 매우 구체적이고 주관적으로 그려진다. 그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구체적이며 객관적이고, 그레이스 막스가 행위(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묘사는 원 없이 추상적이며 주관적이다. 그 시대의 모습과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은 이를 통해 서로를 보완한다.


“저는 앞쪽 베란다로 맥주를 들고 나가면서 같이 저녁으로 먹을 빵과 치즈를 챙겼어요. 낸시와 제이미 월시와 거기 그렇게 앉아 있는데 해가 졌고 잠시 후 바느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어요. 바람 한 점 없는 사랑스러운 저녁이었고, 새들이 지저귀었고, 길가의 과수원에 있는 나무들이 저물어 가는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집 앞길 옆으로 자란 자주색 밀크위드 꽃들이 아주 달콤한 향기를 풍겼어요. 베란다 옆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작약 몇 송이와 덩굴장미가 피어 있었죠. 공기에서 상쾌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운데 제이미가 피리를 부는데 너무 구슬퍼서 심금을 울렸어요. 잠시 후에는 맥더못도 길들여진 늑대처럼 살금살금 나와서 집 옆에 기대고 앉아 피리 소리를 들었어요.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죠. 참 기분 좋은 저녁이었는데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을 때처럼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면서 만약 저에게 소원이 있다면 우리가 영원토록 변함없이 그렇게 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p.332, 1권)


소설의 진행 방식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모든 것을 순서대로 말하지도 않고, 순서대로 말하는 경우에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 있는데,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말해준다. 마거릿 애트우드를 읽는 것은, 그 이후를 자꾸 넘겨짚고 그 넘겨짚음이 오류로 확인되고, 또다시 넘겨짚는 행위를 거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맥더못이 나한테서 무슨 말을 들었다고 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서 무슨 말을 똑똑히 들었다고 했는지도 생각난다. 자기가 각본을 미리 준비해 놓고 상대방의 입안으로 쑤셔 넣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박람회나 품평회에서 복화술을 보여주는 마술사와 같고, 그들 앞에서 나는 그저 나무 인형일 뿐이다. 재판정에서도 마찬가지라, 나는 피고석에 앉아 있었지만 사기로 된 머리를 달고 안에 솜을 넣은 천 인형과 다름없었다. 나는 나라는 그 인형 속에 갇혀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들의 일부분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남들이 내가 했다고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pp.94~95, 2권)


작가 자신이 느껴야 했던 호기심은 (실재하는 인물들인) 사건의 가해자였던 그레이스 막스와 제임스 맥더못 그리고 사건의 피해자였던 키니어 나리와 낸시 몽고메리를 비롯해 (아마도 만들어진 인물들인) 메리 휘트니와 제레마이어를 통해 조금씩 해소되는데, 그러한 해소가 곧 사건 전체에 대한 후련한 해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소설 속에서 그레이스를 인터뷰한 사이먼 조던 박사가 느끼는 혼란은 곧 독자가 느껴야 하는 혼란이기도 하다.


“... 우리 위원회의 몇몇 위원들도 목격했다시피 신경 최면에 걸렸을 때 그레이스 막스는 과거의 그 사건을 완벽하게 기억했을 뿐 아니라 몽유병으로 인해 이중인격현상도 보였습니다. 제1의 인격체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2의 인격체가 발현된 겁니다. 조던 박사님은 증거를 감안했을 때 우리가 ‘그레이스 막스’라고 알고 있는 여성은 낸시 몽고메리 살인 사건 당시 의식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2의 숨겨진 자아만 그 사건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p.285, 2권)


실제 인물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때때로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떠오르고는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는 차이가 있지만 상상의 영역을 뛰어넘는 생생함으로 인물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두 작가가 나란히 있다. 시간이라는 격차를 건너뛰고 그 시대와 그 인물을 향하여 순식간에 직진하도록 만드는 몰입감이 훌륭한 소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 이은선 역 / 그레이스 (Alias Grace) / 민음사 / 1권 334쪽, 2권 337쪽 / 2012 (199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거릿 애트우드 《증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