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유년의 섬 : 나의 투쟁 4》

성장의 한 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던 아버지라는 블랙홀을 통과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의 네 번째 권이 지난 10월에 출간되었다. 세 번째 권이 나오고 삼 년이 지나서야 그 다음 권이 나온 것이다. (원제의 제목은 Min KAMP 3, 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마도 여섯 권으로 현지에서 완간된 것이 번역본으로는 보다 많은 권수로 출판될 것 같다.) 두 번째 권과 세 번째 권은 한꺼번에 출간되었는데, 어쨌든 출판사가 좀 더 분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삶의 한자리에 차지하는 기억의 크기는 측정할 수 없다. 기억을 이루는 최고의 가치가 진실이 아니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이 맞는지 틀리는지 결정하는 것은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기억은 전적으로 한 개인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다. 기억은 실용적인 것이다. 때로는 교활하고 음흉할 때도 있지만 악의나 적대감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기억은 우리의 만족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기억들은 망각의 세계로 밀려나기도 하고, 어떤 기억들은 다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기도 하며, 또 어떤 기억들은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반면 어떤 기억은,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너무나 선명하고 정확하게 우리 머릿속에 남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을 선명하고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20)


이미 출간된 《나의 투쟁》의 다른 책들이 현재와 과거를 오고가면서 진행된다면 이번 책은 오롯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야기들이 할당되어 있다. 공간적으로는 네 식구가 머물렀던 노르웨이 남쪽 작은 섬이 무대인데,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흔들리는 유모차에 실린 채 그곳에 도착하고, 우리의 중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7학년이 되어 이사를 하게 될 때까지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런 이유로 번역된 소설의 제목은 ‘유년의 섬’이라고 되어 있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간다. 한 시간이 눈 깜박할 새에 지나가 버린다. 세상은 활짝 열려 있고,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일을 한다. 해가 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으면 시간은 제자리에 멈춰 선다. 아직 아홉 시밖에 안 되었어? 어렸을 때는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간다. 한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활짝 열려 있던 세상이 막혀버렸다는 느낌이 들면, 머릿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공간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p.207)


사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나의 아버지를, 발현되지 않은 병증을 기원으로 하여 점차 현실감 넘치는 과거를 향하는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했다. 칼 오베가 구체적으로 아버지를, 그러니까 어둠을 발산하는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나 또한 나의 유년기를 두터운 어두움으로 억누르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사랑의 마음을 찾아내기 힘든, 미움의 마음으로만 가득한 그때 그 시절을 어둡게 떠올리는 칼 오베의 현재로부터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을 것이고, 십중팔구 자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자리에 있었고, 아버지가 발산하는 어둠을 상쇄해주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이들의 방에 들어가도 아이들은 몸을 사리거나 시선을 아래로 떨구지 않는다. 아이들은 집 안에서 나와 부딪쳐도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나를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아이들이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아이들이라 해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들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을 때 내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해도 나는 큰절을 하면서 감사히 받아들일 것이다.” (p.378)


만약 내게 아이가 있었다면 나 또한 칼 오베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와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칼 오베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향해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데, 그나마 내가 칼 오베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칼 오베가 지독할 정도로 차가운 마음만으로 아버지를 소환하고 있다면 (칼 오베는 《나의 투쟁》을 출간하고 나서 아버지의 형제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다는 사실 정도이다.


“... 유년기 한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미래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의 순간은 엄청난 속도로 스쳐갔지만, 그 순간들이 속한 매일매일은 우리가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미끄러져 갔기 때문이다.” (p.389)


이렇게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느라 칼 오베가 보낸 유년기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사고와 사건들에 흠뻑 빠져들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무섭고 무거운 아버지가 블랙홀처럼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유년의 우주는 헤아리기 힘들만큼 넓어서 그것으로만 수렴되지는 않은 것이다. 그 빠르고도 느린 작가의 유년의 시간들은 그 감정과 물질의 초라함까지 포함하여 불가사의할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녀기의 무게는 입으로 훅 불면 사방으로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만큼이나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을 타고 시간 속을 흐르는 작은 강을 건너 무성한 풀 위에 떨어져내려 결국은 자취를 감추어버릴 민들레 홀씨. 그 민들레 홀씨에 담긴 유년의 기억. 아름답지 않은가.” (p.641)


그러고보니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1968년 12월에 태어났고, 나는 그로부터 5개월쯤 뒤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1944년생으로 동갑인데, 나의 부모는 1941년생으로 동갑이다. 무서운 아버지와 (크게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작은 성공들로도 그나마 숨통을 틔우게 되었던) 그 두려운 마음으로부터 아이를 구출하고자 하는 엄마라는 구성은 나와 칼 오베가 같았다. 아버지의 병을 발견한 이후 매주 토요일 저녁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버지의 병으로 드리워진 어두움으로부터 엄마를 잠시 동안이라도 구출해야 한다는 마음도 한 몫 하고 있는 결정이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Karl Ove Knausgånd / 손화수 역 / 유년의 섬 : 나의 투쟁 4 (Min Kamp 3) / 646쪽 / 한길사 / 20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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