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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8. 2024

천운영 《반에 반의 반》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함구하지 않으려는... 

  「우리는 우리의 편이 되어」

  “너의 이런 면이 좋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좋아하는 립스틱을 꺼내 내 입술에 발라주는 순간. 그리고 다시 하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무심하게 숨을 참고 태연히 숨을 고르는 사이. 너는 안쓰럽게 따스하다.” (p.20) ‘너’는 친구의 딸이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의 엄마는 삼십대에 예술대에 입학한 늦깎이 학생이었다, 너를 임신한 몸으로. 나는 이제 너를 인터뷰하며 너와 너의 엄마를 떠올리고, 너는 엄마의 친구이며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한 나에게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일련의 편견을 향하여 유약하지만 돌진하는 것 같은, 서툴러보이지만 멈추지 않는 진행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되어주오」

  “... 마침 오얏꽃이 흩날리는 봄날이었다. 자두나무 아래서 술잔을 비웠지. 아버지와 한 상에 앉아 술을 배우던 날처럼 오롯했다. 여름이 되면 다시 와 자두 맛을 보자 약속했다. 자문 밖 자두 맛은 시고도 달콤하리라 생각했다. 완벽한 하루였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운, 오얏꽃 피던 밤이었다.” (p.67) 나는 그렇게 완벽한 날에 엄마의 몸에 들어섰고, 나는 사라질 뻔하였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이제 나이가 든 엄마와 아버지는 위장 이혼을 하였다.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에서 시작되었다.

  

  「반에 반의 반」

  조신하기만 하였던 할머니의 일탈로 기억되는 어느 하루의 물놀이, 그 물놀이를 가운데 두고 이어지는 설왕설래. 그것을 지켜보는 나무 뒤의 사람은 어쩌면 소설가이거나 아니면 소설 자체일 수도 있겠다. 소설가가 보태는 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의 반에 반의 반에나 미칠까, 나머지는 저절로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때때로 함구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우니」

  독골댁과 관동댁. 독골댁은 며느리였고 관동댁은 그 집에 첩실로 들어간 이일 것이다. 그렇게 독골댁은 자신보다 나이 어린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관동댁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며느리와 한집살이를 해야 했다. 이제 그 양반은 떠났고 함께 늙어간 독골댁과 관동댁은 꽃놀이를 갔다가 엉뚱한 일에 휘말린다.


  「명자씨를 닮아서」

  “요르단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어머니의 의사를 물을 딱 한 번의 기회가 있대요. 팔 개월이 지난 후에. 그전에는 물어볼 수도 없고 먼저 의사를 밝힐 수도 없어요. 자식이 물으면 어머니는 대답해야 해요. 재가를 할 것인지 아닌지, 그 결정에 대해서는 자식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요. 어머니가 결정을 내리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해요. 묻고 대답할 단 한 번의 기회. 결정하기까지 팔 개월의 기간. 그걸로 끝.” (p.144)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조기 폐경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엄마, 그런 엄마와 함께 그를 기억하는 한국으로 여행을 온 나. 조기 폐경 후의 임신이라는 마지막 설정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겠다. 


  「내 다정한 젖꼭지」

  <반에 반의 반>, <우니>와 함께 독골댁과 관동댁이라는 캐릭터가 연결되어 보여지는 또 한 편의 소설이다. 며느리였던 독골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 남은 관동댁은 내게 아기 기저귀를 가는 모습으로 남는데... 

  

  「봄밤」

  독골댁과 관동대과 연결되는 길현씨... 독골댁과 관동댁 소설의 외전 격이랄까. 아주 짧은 소설인데 마지막 문단이 좋다. “실현씨가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괘종시계가 울렸다. 깊고 묵직한 자정이었다. 종소리가 멈추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고요가 다정하고 편안했다. 갓난애 옹알이 소리가 간간이 묻어오는, 봄밤이었다.” (p.197)


  「다른 얼굴」

  인간의 어두운 이면, 그것을 다른 얼굴이라고 칭하자. 우리는 다른 이의 다른 얼굴에 치를 떨고는 하는데, 정작 자신 또한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어딘가 레이먼드 카버 류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뉘앙스가 짙다.


  「금연 캠프」

  금연 캠프에 참가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섯 날에 걸쳐 문서연, 이금순, 이정희, 서희주, 김숙희, 오현주, 윤다영이라는 일곱 명에 의해 차레대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금욕을 통하여 살펴보는 욕망의 이야기이다.



천운영 / 반에 반의 반 / 문학동네 / 299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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