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시작한 질문의 완성을 요구받는 것이어서 혼란스러운...
윤이형 작가는 자신의 다물어지지 않는 질문들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기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아직 진행형인 질문들이어서, 구체적인 형상을 띠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아직 추상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작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작가가 시작한 질문의 완성을 요구받는 것이어서 혼란스럽다.
「작은마음동호회」
“우리는 바이링궐이다. 우리의 말들은 반쯤은 자신의 것이지만 반쯤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싸우려다 종종 싸울 대상을 변호하며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는 성나고 괴로운 마음이 되어, 자신을 때려 기어이 피를 내곤 한다. 아무리 싫어도 우리 입에선 자꾸만 ‘아줌마’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그 말이.” (p.12) 아내들과 며느리들과 딸들인 이들이 모여 책자를 만든다. 책자의 일러스트를 맡아준 서빈과 나는 오래전 친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 간극에 여성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승혜와 미오」
어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주는 사람들이 반가울 수 있다. 여기 만난 지 4년 그리고 함께 산 지 3년이 된 커플 승혜와 미오가 그렇다. 이성애자의 눈으로 가치를 판단하려 하지 말고, 인간의 눈으로 그 가치의 판단을 유보하는 것만으로도...
「마흔셋」
“... 거기에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아주머니의 논평과 질문(입원을 하셨다면 그래도 재경이는 와서 엄마를 돌봐주고 있겠지요? 큰 딸이잖아요), 그에 대한 엄마의 변명(일하느라 바쁜 애 부르기 그래서. 나는 혼자 할 수 있어), 거기에 놀라 이어지는 힐난에 가까운 질문(재윤이는요. 둘 중 하나는 와야 하지 않겠어요. 엄만데요)과 방어(아휴, 걔는 자기 문제로 고민이 많아. 됐거든), 분노(아니, 지금까지 얼마나 숨긴 거예요? 또 어디가 안 좋으신 거예요? 정말 말씀 안 하실 거예요?)와 손사래(아니, 아니라니까. 참 나, 귀찮아라), 그리고 폭발(언니! 거기 가만있어요. 나 지금 가니까) 또한 길들여져 있었다.” (pp.72~73) 엄마의 휴대폰을 통해 그간 엄마가 홀로 치러낸 병의 역사의 일단을 그 딸이 들여다보는 장면인데, 기억에 남는다. 엄마와 두 딸, 그러나 그중 한 딸은 딸이 아니라 아들로 스스로를 바꿀 작정이었다. 그 사이 엄마는 죽었고, 남은 한 딸은 이제 언니가 아니라 누나라고 불리운다.
「피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피클 단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속의 이것들이 우리죠... 혐오와 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서, 나 혼자 아무리 올곧게 살겠다고 마음먹어도 물들지 않기가 쉽지 않아요.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죠.” (p.92) 퇴사한 후배 유정에게서 날아온 메일, 그러니까 편집장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선우가 보낸 어떤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웃의 선한 사람」
“... 저는 제 머리 뒤쪽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어요. 총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죠. 그래서 상상할 필요가 없어요. 몸의 방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거기서 방향을 바꾼다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미 봐서 아는 일들만 계속, 계속, 계속 다시 봐야 한다면 결국 정신을 놔버리지 않겠습니까?” (p.164) 나의 딸을 구해준 남자, 이웃집의 선한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는 나의 딸과 스치고 나서 나의 딸의 미래를 보았고 바로 그 장소에서 나의 딸을 구했을 뿐이다.
「의심하는 용 - 하줄라프 1」
하줄라프는 용이 살고 있는 도시이다. 하줄라프의 용들의 소명은 전투 아니면 번식이다. 번식이 이루어지면 용의 알은 인간의 도시인 스롬의 ‘어느 집 문 앞’으로 굴러떨어진다. 그것을 발견한 알을 인간이 품으면 그 용은 이후 그 인간을 용기사로 삼아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때 선택되지 못한 알은 다시 하줄라프로 돌아오게 된다. ‘갈’은 바로 그렇게 돌아온 용이었다. ‘갈’은 번식에 참가해야 하는 암용이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하줄라프라는 도시와 용들 그리고 인간들 전체에 대한 의심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갈’은 ‘이파’를 만나고, ‘갈’과 ‘이파’는 ‘미슐레’와 ‘뮬’이라는 두 소녀를 만나고, ‘이파’는 새로운 세계를 꿈 꾸고, ‘갈’은 두 소녀를 공격하려다 멈추고, 다시 두 소녀의 공격으로 배에 기다란 창이 꽂힌다.
「용기사의 자격 - 하줄라프 2」
하줄라프는 Hajullaf 이고, 하줄라프의 애너그램은 Fallujah, 팔루자이다. 팔루자는 이라크의 도시로, 대대로 수니파 무슬림의 거점이었고, IS에 점령당하였다가 2016년 이라크 보안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용과 용기사의 이야기는 IS에 가담한 아들을 둔 엄마들의 꿈에 나타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엘렌 또한 비슷한 꿈을 꾼 바 있다.
「님프들」
“... 나는 준에게서 태어나 준 손에 자랐어요. 준이랑 친구가 되고, 사랑하고, 사귀고, 미워하고, 화해했다가, 또다른 준과 결혼해서 결국 준을 낳고, 준을 완성해가는 그런 끝없는 이야기...” (p.286) 워터하우스라는 화가가 그렸다는 ‘힐라스와 님프들’이라는 제목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혼란 속에서 소설을 읽었다. 그 그림 속의 님프들이 모두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설을 읽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말끔한 정신으로 읽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
“... 섬광 이후 약 삼십억 명의 남자들이 납치되어 사라졌고 그들의 빈자리는 여자들이 채웠다...” (p.297) 그러니까 나는 삼십억 명의 남자들 중의 한 명이다. 나는 어떤 방에 갇혀 있고 네트워크로 바깥을 향해 비명을 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수아」
수아라는 이름 뒤에 붙은 넘버만 다른 로봇들이 가득한 세상이 된다. 나에게도 수아라는 이름의 로봇이 있었지만 나는 수아를 도서관으로 보냈다. 수아는 다리를 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도서관으로 찾아갔을 때 수아는 이미 떠난 뒤였고, 나는 남편과 들른 호텔에서 수아와 수아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역사」
나 혹은 우리의 역사는 엘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엘레의 왼발’이었고, 그들이 엘레를 베어버리면 그것들이 온전히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열여섯 명이 되었고, 그렇게 열여섯 명인 채로 외진 동굴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그 그룹에서 뛰쳐나가길 원했고, 그렇게 나는 우리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인 강으로 실려 가게 된다.
윤이형 / 작은마음동호회 / 문학동네 / 354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