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하게 발아하였으나 지나치게 소품으로 제작된...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스물아홉번째 면접장에서 중년의 면접관들의 면면과 행태, 그리고 나란히 앉은 면접자들의 응대 속에서 나는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을 기억해낸다. 현재와 과거를 오락가락 하는, 면접의 장면과 여자친구 아버지들과의 대면 장면을 오버랩 시킨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양들의 역사」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일본인 행세를 시작한다. 나는 이미 일본 사람으로 오인되고는 했던 전력이 있다. ‘양들의 역사’라는 제목이 뭘까 생각하는데, 아마도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의 세례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그 양들을 떠올리게 된다. 택시 기사에게 일본인 행세를 하는 나와 한국에서 벌어진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한 켠에 자신을 등장시키는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택시 기사의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경마학 개론」
제목은 ‘경마학 개론’이지만 소설 안에서는 경마가 등장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마장 가는 길에 있었던, 경마장으로 가는 대신 샛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어느 날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위한 만찬」
1999년 유아들이 머물고 있던 컨테이너에 불이 나 스물 세 명이 사망하는 씨랜드 참사가 있었다. 그때 전직 국가대표였던 운동 선수 엄마가 사고 이후 이 나라를 떠나 이민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은 마치 그 뒷 이야기 같다.
「매우 그렇습니다」
경품에 당첨되어 노트북을 수령하게 되고, 나는 그 노트북을 여자친구에게 선물한다. 경품이라는 이야기는 쏙 빼고 선물한 노트북이 말썽을 일으키고, 여자친구는 수리 기사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쏟아낸다.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긴장이 나와 여자친구, 여자친구와 수리기사, 수리기사와 나, 그리고 다시 나와 여자친구로 한 바퀴 크게 돈다.
「수학과 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 중 그나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사라진 자리에 프로그램이 들어서고, 이제 나는 그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안나 카레니나>의 이종(異種)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의 수정 작업에 휘말린다. ‘수학과 불’은 아마도 프로그레밍 된 소설과 인간의 소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러한 구분 조차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밤낚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인 조와 나는 어느 섬으로 밤낚시를 떠난다.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변호사 김은 함께 하지 않았다. 각자의 이름으로 수령 가능한 생명보험 그리고 조의 열악한 상황이 밑밥으로 깔리면서 어떤 사건을 가늠케 하지만, 소설은 그 가늠의 선에서 끝이 난다.
「필경사 조풍년」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과 함께 박정희의 유신 헌법이 공포된다. 소설은 그 유신 헌법에 포함되어 있는 오자로부터 발아했다고 여겨진다. 解散과 解産사이, 바로 그 사이에 필경사인 조풍년이 자리잡고 있다.
「천국의 문」
<천국의 문>은 2015년 <한국문학> 겨울호에 실린 작품으로, 이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이기도 하다.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딸의 시점으로 그려진 소설이고, 죽음에 대한 혹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김경욱 /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 문학동네 / 253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