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게 짜깁기 된 현실이 초래한, 블러 처리된 초라한 미래...
어촌에 한 기업이 들어서고 사세가 확장된다. 도시는 이제 기업의 이름으로 불리고 기업의 계열사들이 건물을 짓고 그 계열사인 금융회사만이 그곳에서 돈을 돌린다. 기업에 혜택을 주었던 지자체가 파산하고 이제 기업이 그 도시를 사들인다. 팔순의 기업 회장은 담화문을 발표하고 ‘타운’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도시 국가가 탄생한다.
“타운에는 L과 L2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주민권인 L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L, 또는 주민으로 불린다... 주민 자격은 갖추지 못했지만 범죄 이력이 없고 간단한 자격 심사와 건강 심사를 통과하면 L2 체류권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체류권과 같은 이름인 L2로 불리며 2년 동안 타운에서 살 수 있다... 진경은 L2도 못 되었다. ‘사하’라고 불리었다. L도 L2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마땅한 이름도 없는 이들. 사하맨션 주민이라서 ‘사하’인 줄 알았는데 사하맨션에 살지 않아도 ‘사하’라고 했다. 너희는 딱 거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pp.14~15)
소설의 주무대인 사하 맨션을 상상하면서 홍콩의 구룡성채나 브라질의 파벨라를 떠올렸다. 원래 타운은 어촌인 곳이었다고 하니 브라질 보다는 홍콩 쪽을 떠올리는 것이 낫겠다. 물론 타운의 사하 맨션은 홍콩의 구룡성채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규모 면에서 그렇다. 내가 본 것은 소설이고 영화와는 (실사로 만들어진 공각기동대를 떠올려 보면 그렇다. 아비정전을 떠올리는 것이 낫다) 다를 수밖에 없다.
“두 손과 팔, 옷이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덜덜 떨고 있는 도경을 보며 진경은 오래된 맨션을 생각했다. 수십 년 전에 독립했다는 남쪽 어딘가의 작은 도시국가. 세상을 향해 높고 단단한 벽을 쌓아 올린 나라. 그 안에 다시 섬처럼 고립된 어느 맨션. 이토록 완벽한 은신처가 또 있을까...” (p.64)
그곳 사하 맨션에 조용히 스며든 진경과 도경 남매가 있고 이들로부터 소설은 진행된다. 하지만 그곳에 이미 머물고 있던 사람들, 관리실의 영감과 꽃님이 할머니, 우미, 사라, 이아 등이 있어 소설은 시작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일종의 열외자이인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고, 이들 중 일부가 주류의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타운의 정체에 한 발 다가서는 것이다.
“타운 독립 초기, 새 정부에 반대하는 L2와 사하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시위라고도 폭동이라고도 혁명이라고도 했는데 영감은 ‘나비 혁명’이라고 말했다...” (p.79)
소설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기업의 돈이 하나의 도시를 만들고 파산한 지방 정부가 어쩔 수 없이 기업에 도시를 넘겨야 한다는 설정은 불가능해보이지만 실상은 이미 구체적으로 실현된 현실일 수도 있다. 재벌 기업 소유의 병원에서 태어나고 그 재벌의 계열사가 만든 지은 집에서 자라고 그 재벌의 계열사가 만든 제품을 쓰고 그 계열사가 만든 빵을 먹고 그 재벌 기업 소유의 대학을 나와 그 재벌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기를 써야 하는 하나의 순환 사이클이 완성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주민허가제를 도입해 양질의 인력에게만 국적을 주는 타운은 생산성과 국민소득이 놀랍도록 높은 대신 노동력이 부족했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한 먹을 것을 만들고 잘 곳을 치우고 배설물을 처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인구 절벽 현상을 해결하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타운은 국적 취득 자격이 안 되는 이들에게 시한부 체류권 L2를 주었다. L2조차 안 되는 이들의 체류도 일부 묵인해 주었다. 그렇게 L2와 사하들의 비율을 좀차 높여 가다가 20여 년 전부터 전체 거주민의 30퍼센트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p.244)
소설의 완성도라는 측면보다는 소설이 주는 메시지에 주력하여 읽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작가의 전작에서도 그랬다. 의미 없음 보다는 의미 있음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우미라는 존재와 타운 운영의 비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총리단의 허상을 보여주는 방식은 조금 안이해 보이기도 한다. 어둡게 짜깁기 된 현실이 초래한, 블러 처리된 초라한 미래를 들여다본 느낌이다.
조남주 / 사하맨션 / 민음사 / 370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