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타하는 마음과 자책하는 마음으로 우왕좌왕 하면서...
보통은 소설과 비소설을 한 권씩 동시에 읽어나간다. 물론 좌우에 놓고 번갈아 읽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때그때 지루해지지 않도록 번갈아 읽는다. 보통은 소설을 읽는 속도가 다른 산문을 읽는 속도보다 빠르다. 시는 예외여서 마음이 툭 불거져 오를 때 불쑥 집어 들고, 읽는 속도도 제멋대로이다. 소설 《로야》를 읽다가 두 번 아니면 세 번, 책읽기를 아예 멈출까 고민했다.
“빨래뿐만이 아닌 일.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 마음은 싫다고 하는데 머리는 해야 한다고 하는 일. 힘들게 해 놓고도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일. 나를 한없이 없애야 하는 일.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일. 아파도 내색할 수 없는 일. 내가 느끼는 아픔에 당위성이 있는지 의심하게 되는 일.” (p.84)
어쩐 일인지 도통 소설에 집중하기 힘든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부분이 현실인지 주인공의 꿈속인 것인지 몇 번이나 헷갈리고 말았다. 나는 그것이 독자인 나의 잘못인 것인지 아니면 적절한 방법으로 서술을 통제하지 못한 작가의 잘못인 것인지 헷갈렸다. 소설 내부의 진행 방식을 질타하는 마음과 내 헷갈림을 질책하는 마음이 충돌하였고, 이럴 바에야 그만 읽자, 라고 생각한 것이 두어 번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엄마는 부글부글 화를 키웠을 것이다. 두고 보자 괘씸한 마음으로 이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들한테 울분을 쏟아 내면 아들을 나쁜 자식으로 만들까 봐 참고 참았다가 나한테 전화했을 터였다. 엄마 말을 듣고 있자니, 제사는 자신의 남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딸의 아빠를 위한 것이었다. 남편의 자리는 없었다. 당연히 아내의 자리도 없었다. 남편과 아내의 자리가 없는 곳에 아빠와 자식의 자리가 있었다. 엄마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p.197)
여하튼 모두 읽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공의 딸인 ‘로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주석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로야’는 페르시아어이고 ‘꿈’이나 ‘이상’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주인공의 꿈 내용이 등장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구나 싶어졌다. 소설의 제목이 ‘로야’인데 어째서 ‘로야’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더디고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이지, 품었던 의구심도 해소는 되었다.
“... 어찌 완벽하지 않은 아이가 있겠는가. 완벽하지 못한 부모더라도 그들의 아이는 완벽하다. 그러고 보면 모든 부모는 한때 완벽한 아이였다. 그 완벽한 아이에게 완벽하지 못한 부모가 있었다.” (p.230)
그래도 역시 속 시원한 책읽기는 아니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캐나다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그리고 주인공이 직접 겪게 된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후유증이 주인공이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 설정에서 갖게 되는 다양한 억하심정과 유려하게 연결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이란인인 남편 그리고 딸인 로야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그러니까 나의 설명이 아니라) 묘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와 함께하기 전의 세월이, 그와 함께한 세월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안다.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흔한 존재가 고유한 존재로 남기 위해, 평범한 존재가 비범한 존재로 남기 위해, 미세한 존재가 거대한 존재로 남기 위해, 우연은 필연이 되고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남는다. 남기 위해 죽고 죽은 뒤에 남는다. 로야가 남고 로야의 로야가 남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남는다.” (p.279)
물론 이러한 나의 겉도는 독서가 남성이라는 나의 성별과 유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딸이면서 동시에 딸을 자식으로 둔, 딸이자 어미인 주인공이 갖게 되는 마음의 깊은 곳, 쉽사리 드러낼 수 없고 그래서 종종 꿈으로 등장하고 마는 마음의 형태를 짐작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적다보니 누군가의 딸이면서 어미인 누군가의 리뷰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이앤 리 / 로야 / 나무옆의자 / 287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