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밝은 측면 대신 어두운 심연을 향해서만 뻗어가는 작가의 촉수...
「소년이로 (少年易老)」
소년 소진은 소년 유준의 집에 들르고 그곳에서 하룻밤 자는 일도 종종 있다. 유준의 집은 크고 그곳에는 소진이 잘만한 방이 있다. 유준의 아버지는 회사를 운영하는 자였지만 이제 집안에 누워 지낸다. 유준의 엄마가 아버지를 대신해 회사를 운영하지만 여의치 않고, 유준의 아버지는 죽고, 소진의 손아귀에서 새는 죽고, 유준네는 이사를 떠나고, 이 모든 것을 소진은 지켜본다. ‘소년이로’가 少年易老學難成이라는 고사성어에서 나온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고사성어에 따르자면 ‘소년이로’는 소년은 늙기 쉽다, 는 의미일 것이다. 두 소년 소진과 유준은 이 소설에서 얼마나 늙었을 것인지...
「우리가 나란히」
우지와 나는 친구의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이를 회수하지 못했다. 나는 이혼을 했고 아버지가 주는 용돈을 받아 살았다. 우지는 매니저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있었지만 실은 그가 매니지먼트 하는 것은 그의 동생이었다. 우지와 나는 회수하지 못한 돈에 대한 울분으로 붙어 다니다가 다시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붙어 지내게 된다. 아역 배우 출신인 우지는 자신을 대신해 배우의 길로 들어선 동생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다. 전체적으로 어수선헌 소설이다.
「식물 애호」
교통 사고에서 오기는 살아남았고 오기의 아내는 죽었다. 오기는 고아나 다름없었고, 그래서 지금 오기를 돌보는 것은 오기의 장모이다. 장모는 그를 그의 얼마 되지 않은 주변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고, 그의 아내가 남긴 정원을 가꾸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그를 케어하는 일과 식물을 애호하는 일 사이에 어떤 구분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구분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원더박스」
수만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그는 자신의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그의 회사에 손해를 끼친 김사장을 찾아갔다가 사고를 당하고 드러눕는다. 수만의 아내 소영에게도 아무 잘못이 없다. 그녀는 수만을 돌보고 또한 노파와 노인이 있는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잘못이 없지만 잘못된 결과들은 도처에 있다. 이상한 상황들이 천지에 있다.
「개의 밤」
매상무, 라고 뒷말을 듣는 김은 사건 처리 담당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고로 죽거나 다친 직원들의 남은 가족을 만나 뒷수습을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그의 처남이 후임병을 때려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아내는 내게 어차피 하는 일이 그러하니 후임병의 가족을 만나서 문제 해결에 노력해달라는 언질을 받는다. 소설의 중간중간 울려 퍼지는 개소리들 사이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있다.
「잔디」
중학교 교감인 남편은 불미스러운 일로 정직 중이다. 자신의 집 마당에 뿌린 제초제가 잡초는 내버려두고 잔디만을 골라서 죽인 것은 정직 중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남편은 제초제 회사에 계속해서 클레임을 걸지만 그들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남편은 그들의 잘못을 입증할 수가 없다. 남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월요일의 한담」
『유가 무릎을 꿇고 아내와 부모 앞에서 사과한 후 담배를 피우러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데 아버지가 뒤따라 나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하더니 말했다.
“인생에 건질 건 식구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건지셨어요? 저와 형요?”
아버지가 갑자기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니들이 나를 덥석 물었지. 그래서 나도 열심히 버텼다.”
유는 자신을 버티게 하는 것은 그 여자라고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릎 꿇은 게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덥석덥석 잘도 물더라. 나중엔 안 그럴까봐 겁이 났지.”
나란히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 유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담배를 끊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내가 너를 물고 있구나.”
유가 대꾸할 말을 고르는 사이 아버지가 말했다.
“살살 물고 있을께.”』 (pp.217~218)
이 대화의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음 손님」
아버지는 오보에 연주자였고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를 돌보았다. 돌보았다기 보다는 길들였고, 그 자신도 길들여졌다. 외할아버지가 요양원으로 떠나고 얼마 지나 사망한 뒤에도 아버지는 예전의 오보에 연주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나는 그 사이 집을 떠났고 지금은 간병인으로 일을 하고 있다. 엄마는 그 사이 직장에서 만난 나이든 이와 살림을 차렸고, 나는 몇 차례 그 남자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남자가 나를 찾는다. 엄마가 경미한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편혜영 / 소년이로 (少年易老) / 문학과지성사 / 255쪽 / 201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