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오리지널 오브 로라》

인덱스카드로 살펴보는 소설의 속살 혹은 소설의 민낯...

by 우주에부는바람

“이 작품을 퍼즐에 비유한다면, 나보코프가 남기고 간 인덱스카드 원고는 그 퍼즐을 이루는 조각일 것이다. 작품 초고를 쓸 때 인덱스카드를 애용하는 것은 나보코프만의 독특한 집필 방식이었다. 집필한 카드가 일단 어느 정도 모이면, 고무 밴드로 묶어 그 뭉치를 손 안에서 굴리거나 카드 게임처럼 섞거나 하면서 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렇듯 나보코프에게 집필중인 자신의 ‘작품’은 단순히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감적인 물체에 가까웠다. 일단 카드에서 초고가 완성되면, 카드의 배열을 바꾸거나 파기하거나 수정하는 단계를 거친 다음 비서나 베라 여사에게 타이핑을 부탁했고, 그렇게 원고가 점차 책의 형태를 띠게 되면, 초고였던 인덱스카드는 집 뒤뜰에 있는 소각장에서 나보코프가 손수 태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pp.222~223, 해설 중)


나보코프는 1975년 취미인 곤충 채집을 위해 산에 올랐다 산비탈에서 굴렀고, 가까스로 케이블카를 타고 지나가던 관광객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책에 실린 완성되기 전인 상태의 소설은 바로 그 해에 집필이 시작되었다. (그 착상은 나보코프의 일기에 따르면 1974년에 이루어졌다) 나보코프는 그로부터 2년이 흐른 다음 병원에서 감염된 고약한 세균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2년 전 쓰기 시작한 소설은 아직 완성이 되기 전이었고 나보코프는 죽기 전에 이 완성되기 전인 인덱스카드를 폐기하라고 했다.


“생각에 몰두하여 내 몸과 내 존재, 그리고 정신까지도 다 소거하는 방법이 불현듯 떠올랐다. 생각에 빠져 생각을 없애버리기 - 호사스러운 자살, 감미로운 용해! 용해는 사실 여기서 경이적일 정도로 딱 들어맞는 용어인데, 당신이 이 편안한 의자에(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치는 화자) 긴장을 풀고 앉아서 당신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하면 발에서부터 위로 점점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가장 먼저 들기 때문이다.” (p.144)


이 책이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은, 이 인덱스카드 형태의 소설 초고를 출간한 것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들인 드미트리 나보코프였다. 나보코프가 죽은 것이 1977년이었고 책이 나온 것은 2009년이었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이 원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다음 곧바로 출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과 그 유언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알릴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뉘앙스를 거듭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 그녀는 유난히 깡마른 소녀였다. 늑골이 다 보일 정도였다. 너무 납작해서 ‘배’라는 개념이 무색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복부를 튀어나온 골반뼈 마디마디가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의 정교한 골격은 다수의 시편을 지탱했을 뿐 아니라, 한 편의 소설 속으로 바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사실상 그 소설의 은밀한 골조가 되었다. 스물네 살 먹은 그 성마른 미녀의 젖가슴은 컵 크기가 제 나이보다 열두 살은 어린 소녀의 크기밖에 안 되었는데, 사팔뜨기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옅은 색 유두가 달려 있고, 형태가 딱 잡혀 있었다.” (pp.29~30)


완성되지 않은 인덱스카드 형태의 초고가 보내는 손짓은 소설의 속살 혹은 소설의 민낯을 향한 유혹에 다름 아니었다. 스캔된 형태로 책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인덱스카드는 어린 시절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사용했던, 단어장을 닮아 있었다. 나보코프는 죽기 전까지 모두 138장의 카드를 썼다. 각각의 인덱스카드에는 챕터가 표시되어 있고 원문자의 숫자나 기호가 들어있다.


“* 이 카드의 오른쪽 위에는 ‘적어도 세 개의 카드로 이 소재를 다룰 것’이라는 나보코프의 메모가 적혀 있다.” (p.128)


해설을 쓴 이는 나보코프가 약 300장 정도의 카드로 중편 소설 분량의 원고를 계획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간혹은 위에서처럼 메모가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나보코프가 추가하고 싶어 한 것들을 추측해볼 수도 있다. 소설은 플로라라는 여성을 화자로 삼아 시작된다. 이 여성은 현재 나이 든 의사 남편을 두고 있는데, 이 의사 남편 또한 이런저런 글을 쓰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플로라는 또한 한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 남자는 이 플로라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그것이 바로 <나의 로라>이다. 그러니까 플로라는 로라의 원형인 셈이다.


“제거하다

인멸하다

지우다

삭제하다

문질러 없애다

쓸어버리다

말소하다“


소설의 내용보다는 책에 실린 마지막 인덱스카드가 내게는 더욱 긴밀하게 다가왔는데 내용은 위와 같다. 나보코프는 위의 단어들 중 맨 위의 ‘제거하다’에 동그랗게 표시를 해놓았다. 자신의 문장 안에 넣으려고 하는 단어를, 가장 적확한 단어를 고르고자 하였던 작가의 심혈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보코프의 문장을 향한 나의 애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 / 김윤하 역 / 오리지널 오브 로라 (The Original of Laura) / 문학동네 / 246쪽 / 20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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