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스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 대신 역사의 증발을 꾀하는...
*2019년 8월 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혹은 부족한 일본 정부와의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아내와 나는 고문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 과거로 회귀하며 서로에게 묻고 대답하고는 했다.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독립 운동가에게 가해진 고문 같은 것을 우리는 절대 견뎌내지 못했을 거야. 맞아, 그건 무리야. 크게 애국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때, 태동기에 있는 민족과 국가의 개념을 부여잡고 인간과 인간다움을 걸었던 이들에게는 일단 숙연해지고 만다.
“... 친구는 일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을 간단히 설명했다. 매년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가출해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중에는 이미 생을 마감했으나 시신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 외의 나머지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다. ‘증발한 사람들’의 운명은 비명횡사하거나 영영 잊히거나 둘 중 하나다. 다른 길은 없다. 세계에서 일본만큼 ‘증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인구 1억 2800만 명의 일본에서 증발한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무모하면서도 흥분되는 도전처럼 느껴졌다...” (p.24)
상황이 이러해서 책장을 뒤적이다가 《인간증발》이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어린 시절 이후 흔적 없는 증발을 종종 꿈꾸었던 작가는 프랑스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로부터 ‘증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사진가인 남편(아니면 남자친구)과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증발한 사람들 그리고 증발한 사람들의 가족 그리고 증발한 사람들을 찾는 사람들을 만난다.
책에 실린 사연들은 모두 구구절절한데 “낯선 사람들은 두렵지 않습니다.”라는 어느 증발한 사람의 대꾸가 기억에 남는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들은 아는 사람이 없거나 아는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은 빈민 거주 지역으로 숨어들기 일쑤다. 짧게는 오년에서 길게는 육십여 년을 가족들로부터 사라진 사람이 된 채로 이들은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 문화적으로 일본은 베트남에서 한국까지 이어진 중화문명권에 속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나라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를 탄생시켰고 여기에 강력한 국수주의 감정을 추가했다. 친구는 일본인들이 ‘우리는 다른 민족과 다르다’라는 집단적인 우월감과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인종차별 의식에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p.65)
《인간증발》은 증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일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겉모습에 감추어진 그 속살을 들여다보는 어느 이방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버블 붕괴 이후 증발한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처럼 증발의 이유에서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돈이지만 이와 함께 일본인들이 견뎌내지 못하는 수치심 또한 이들을 증발로 내몬다고 작가는 분석한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집단 행동에서의 낙오를 용납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기질과 스스로를 증발시킬 만큼 중요한 생활의 작동 기제로 작용하는 수치심이 맥락을 같이 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아시아 여러 국가를 전쟁으로 내몰고 식민지화 하였던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는 것 또한 이러한 수치심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치를 당하느니 증발을 해버리는 사람들과 수치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려는 일본 기득권 세력은 묘하게 결탁되어 있다.
“사카에가 보기에 일본 열도는 ‘압력솥’ 같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려진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린다. 증발 문제는 터부시되고 있지만 연간 자살자 수 3만 3,000명, 즉 매일 집계되는 자살자 수가 90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일본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p.128)
일본 정부는 그렇다 치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말을 보태는 일부 SNS 인사들의 묘한 언사가 (자한당을 비롯한 극우 인사들의 친일 언사도 까짓 그렇다 치고) 비위에 거슬리고 그래서 심사가 뒤틀리곤 하였다. 갑작스레 커밍아웃하는 세계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그들도 갑자기 애국자연하는 이들이 비위에 거슬리고 심사가 뒤틀려 그러고 있긴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원인과 결과를 뒤집거나 뒤섞는 행위는 옳지 않다.
사실 아내는 일본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처제는 일본 여행 가이드를 업으로 삼고 있다. 아내의 가장 친한 후배는 일본인 남자와 도쿄에서 다섯 살 남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고, 아내와 나는 오래전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현재의 상황에 크게 도움이 될 만 한 언사가 아니라면 SNS 세계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얄팍한 지식 나부랭이로 뻔한 말을 내뱉으며 부아를 돋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레나 모제 / 스테판 르멜 사진 / 이주영 역 / 인간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 책세상 / 254쪽 / 2017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