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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김연수 《시절일기》

'일기'처럼 사적이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가 함께 보내는 한 '시절'에 대

  『... 사전에서는 일기를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나라면 ‘읽는 사람이 없는, 매일의 글쓰기’라고 말하겠다. 심지어는 자신조차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일기가 된다. 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p.17)


  책에 실린 각각의 글에는 (마지막에 실린 ‘사랑이 단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제외하고) 연도와 날짜가 적혀 있다. 아마도 ‘시절일기’라는 책의 제목에 맞추어 그렇게 한 것 같다. 책에 실린 글들은 일기라는 형식에 부합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에 모두 쓴 것으로 보이지 않는 글들도 많다. 다만 일기가 가진 하나의 목적, ‘쓰는 행위 그 자체’라는 목적이 이 글들에 스며들어 있다고 여겨본다.


  『변함없이 눈부신 그 여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돼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지요. 모든 것에.”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사가 못마땅해지는 내게 나치 수용소까지 다녀온 이 할머니가 덧붙인다.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p.31)


  책의 뒷부분 (리뷰가 아니라 서평에 가까운 긴 글들이 있는) 보다는 책의 앞부분에 있는 글들에서 좀더 재미를 느낀다. 103살 할머니의 인터뷰를 보며, 할머니라는 자신의 장래희망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는 장면, 같은 것이 재미있다.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익하다. 늙어가는 일을 서서히 체험하기 시작하는 시절이 바닷가로 밀려드는 파랑처럼 거듭되며 오고 있고 도착해있는 독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 인간의 몸이란 아무리 길어야 백 년쯤 일렁이다가 절로 사그라드는 불꽃 같은 것이고, 제아무리 격렬하다 해도 그 몸에 딸린 감정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백 년만 지나도 오늘의 희로애락을 증언할 입술은 이 땅에 하나도 남지 않는다.” (p.72)


  그러고보니 김연수는 그러니까 나와 연배가 비슷한 작가이기도 하다. 김영하나 이응준이나 김중혁이나 김종광 같은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는 구효서나 박상우나 윤대녕이나 하성란 같은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와는 그 느낌이 다르다. 결국 스러질 지경에 도달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지만, 그 스러짐에 이르기 위한 어떤 시절들을 비슷한 육체적 나이에 이르러 고스란히 공유하고 만다는 점에서 그런 것 같다.


  “소설가에게 건강과 체력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소설가란 임시의 직업, 과정의 지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소설가란 소설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하겠다. 소설가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얘기다. 소설 쓰기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들에게 재능은 이미 오래전에, 한 권의 책으로 소진돼버렸으니까.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 (pp.52~53)


  어쩌면 이들 동년배 작가들은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와 같은 마인드를 공유하고 있는 것도 같다. 글 쓰는 이라는 지위에 대한 낭만적인 사고를 버리는 대신 체력을 키우는,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급변한 지점에 김연수를 비롯한 이들 작가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인드를 전제로 하고 있어 지금까지 큰 공백 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십 년 만의 소감을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어령 선생의 축사가 귀에 들어왔다. “라틴어에서 진실vert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니라 망각oblivio입니다.”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eia' 역시 부정어 ’a‘와 망각을 뜻하는 ’leteia‘의 조합이라고 한다.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이 되리라.』 (p.107)


  반가운 마음으로 책에 실린 글들을 읽었다. 그중 유독 눈길이 가는 지점에 물에 잠긴 세월호가 있었다. 해마다 4월의 그 날 즈음이 되면 작가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노래를 불렀고, 작가는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이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작가의 산문집이 ‘일기’처럼 사적이지 않아서 아쉽지만 어쨌든 우리는 어떤 ‘시절’을 함께 보냈고 또 보내고 있다. 



김연수 / 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 레제 / 333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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