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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김현 《사라짐, 맺힘》

4~50년 전의 형태대로 박제되어 버린 작가의 문장이 난감하여...

  네이버와 구글에서 김현을 검색해본다. 검색된 내용 중 김현이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으로 글을 쓴 최초의 한글 세대’라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1942년에 출생한 김현은 그렇게 한자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충분히 사용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첫 번째 비평 세대였다. 그만큼 동시대의 한글 세대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았고, 1990년 사망 후에 더욱 사랑받는 비평가가 되었다.


  “... 좀 심한 표현을 쓴다면 아파트에서는 모든 것이 평면적이다. 깊이가 없는 것이다. 사물은 아파트에서 그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과 같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은 한 평면 위에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아파트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같이 자신을 숨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깊이 있는 열림이 아니라 표피적인 열림이다. 한눈에 드러난다는 것, 또는 한눈에 드러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깊이를 가진 인간에게는 상당한 형벌이다...” (pp.38~39, <두꺼운 삶과 얇은 삶> 중, 1978년)


  김현은 한국의 모더니즘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계간 <문학과 사회>를 김병익, 김연주, 김치수와 함께 창간하였다. 사람들은 이들 네 명을 문지사의 4K라고 불렀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가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내가 최우선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것은 리얼리즘이었다. 리얼리즘을 표방하며 <문학과 사회>의 대척점에 있었던 것은 계간 <창작과 비평>이었고, 당시의 우리들은 동아리를 방문하는 외판원 아저씨에서 영인본 창비를 사곤 했다.


  “... 한 철학자는 술의 도움을 받지 않는 문학과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으로 나누자는 대담한 제안을 하고 있다... 술의 도움을 받지 않는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그 현실의 올바른 점을 강조하고 부조리한 점을 비판한다.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은 인공의 낙원을 제시하면서 그곳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것이 인간에게 특이한 한 경향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껴안는다.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에서 세계는 부풀어 올라 아름답게 불탄다.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pp.75~76, <불꽃의 말> 중, 1979년)


  90년대 사회주의권의 완전한 붕괴가 있었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결이라는 문학계의 구도도 사라졌다. 모더니즘의 승리라고 부르기보다는 이러한 대결 구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창비뿐만 아니라 문사의 영향력 또한 예전 같지는 않게 되었다. 그 자리를 문학동네와 같은 신생 출판사가 차지하게 되었고, 하루키 등을 필두로 하는 일본 문학의 침공은 국내 문학 전체에 유형과 무형의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다양한 인간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다양한 형태의 도전을 받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건 주위 환경의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 도전이 집요하면 할수록 그것은 압력으로 변한다. 문화는 그런 억눌림에 대한 인간의 싸움의 결과이다. 문화는 그러므로 억압의 소산이다. 어떤 형태의 문화는 그 문화를 산출한 인간을 어떻게 주위 환경이 억압했는가를 보여준다. 불교문화의 자비, 기독교 문화의 사랑은 각각 그 문화의 비밀 중의 하나를 쥐고 있다. 종교는 문화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욕망과 종교는 직결되어 있다. 억압을 형태 있게 표현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것이 종교인 것이다. 종교 없는 민족에게는 억압이 없다. 억압이 무엇인가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옳을 것이다. 자기의 종교를 세워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자기의 콤플렉스를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다... (pp.139~140, <인간과 종교와 문화> 중, 1974년)


  1992년도에 출간된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내가 지금까지 리뷰를 작성하는 습관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행복한 책읽기》를 읽으면서 작가의 친절한 문장에 현혹되었다. 그의 다른 비평서는 《시칠리아의 암소-미셸 푸코 연구》(1990)를 일부분 읽은 것이 전부였다. 비전문가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힘겨웠지만 하나의 문장 문장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감화되었다는 느낌이 여전히 있다.


  『"중년 부인들끼리 영화 보러 다니는 것 말이에요.“ ”그게 어때서?“ ”보기 흉하잖아요.“ ”뭐가?“ ”그럼 보기 좋아요?“ ”댄스 홀 다니는 거보다 열 배 낫구만.“ 아내는 입을 다물었고, 때가 되어 우리는 표를 사서 - 최 회였기 때문에 우리는 천 원을 벌었다 - 들어갔다.』 (p.219, <겉멋 부림의 세계> 중, 1985년)


  생각해보니 이러한 현혹과 감화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글들은 주로 김현이 30대와 40대인 시절에 작성한 것들이다.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에 작성된 것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복한 책읽기》와 비슷한 내용 수준의 글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때의 현혹의 느낌이 온데간데 없어 난감하다. 그가 조금 더 살아 자신의 문장을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싶다. 박제되어 버린 그의 문장이 난감하다.  



김현 / 사라짐, 맺힘 / 문학과지성사 / 291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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