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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희미하게 기억하는 사랑의 잊혀진 궤적을 구체적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문지 에크리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산문집을 내기 시작했다. 에크리는 프랑스어인데,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한이 없는) 쓰는 행위와 그 결과물을 동시에 지시하는 단어이다. 이 시대의 표현 수단으로서 글이 갖는 지위가 계속해서 하락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영상이 보내는 막강한 신호를 생각할 때 ‘에크리’라는 단어는 애처롭다.


  “그는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심했다. 그녀는 낯선 사람들에게 무심했고, 가까운 사람에게만 친절했다. 그것 때문에 한 사람은 자주 섭섭했고 한 사람은 자주 미안했다. 한쪽이 섭섭할 때에 한쪽이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에는 심하게 다투었다. 그녀는 해명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해명이 자세할수록 그는 변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해명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명백한 과오라고 자주 단정 지었다. 그녀는 그의 가족들의 문제점에 적응하지 못했고, 그는 가족들의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부적응 상태를 고쳐보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역시 그녀 가족들의 문제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미 인지하고 포기하고 있는 부분들이 그에 의해 자주 들춰지는 것을 그녀는 싫어했다. 어느 쪽이든 가족들과 만나는 날에 그들은 번번이 심하게 다투었다.” (pp.27~28)


  산문 중에서도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던 강한 이야기성은 그것이 글이라는 매체를 거치지 않고 (실제로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대중에게는 노출되지 않는다.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의 비하인드 다큐멘터리에서는 출연진들이 출력된 대본을 읽은 다음 곧바로 그것이 회수되어 파기되는 과정이 담겨져 있었다.) 곧바로 영상으로 전이됨으로써 더욱 빠르게 그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있다.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이 당위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보장해주면 좋으련만, 사랑이 지닌 위험으로 기울 때가 많다. 그래서 타고난 사랑의 능력을 훼손당하기도 하고,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불신하기도 하며, 미지에 대한 당연한 불안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압력과 폭력에서 기인된 트라우마가 심장 깊숙이 각인되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 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 개인의 서사가 두려움 없이 전달되고 이해되며 존중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p.39)


  이러한 소설 장르의 이미 도래한 위기 안에서 (그러니까 영상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독자들도 빼앗기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산문 쓰기를 부업인 듯 전업인 듯 겸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의 사진 기능으로 어떤 피사체이든 (별도의 테크닉으로 포장하지 않고도) 포착하는 것처럼,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일상의 수많은 구성물을 (별도의 이야기로 포장하지 않고도) 쓰고 있다.


  “... 사랑이 소중하지 않으니 이별은 시시했다. 그 누구도 심자 속에 각인되지 않았다. 그 시절에 그녀는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를 만났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을 그렇게나 좋아했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과 좋아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떤 느낌으로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좋아했다는 것은 기억에서 선명하다는 점이 그 시절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들-이별들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p.136)


  시인도 소설가도 평론가도 모두가 산문을 쓰고 있다. 심지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숫자의 일반인 계정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산문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그보다 많은 숫자의 계정이 이미지와 영상을 송출하고 있기도 하다.) 읽을 만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해내는 것은 이제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무엇이든 쓸 수 있고 이상한 것과 유니크한 것을 구분하는 것은 논하는 자가 아니라 소비하는 자의 몫이 되었다. 


  “시스템 속으로 진출하는 일과 안정적인 입지를 욕망하는 일과 그럼으로써 더 큰 불안의 수렁 속을 헤매는 일을 그만두는 일.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입성하여 불안의 출렁임을 함께 즐길 용기를 내어주는 일. 경력보다는 경험을, 사회적 입지보다는 세계에 대한 태도를, 안정보다는 세계에 대한 태도를, 안정보다는 표류를 함께 도모하는 일. 삶에 관하여 영원한 딜레탕트로 남는 일. 불안에 관하여 가장 전문적이고 능란해지는 일. 이런 일을 함께할 사람을 곁에 두는 생을 그녀는 사랑이라 명명하고 싶다.” (pp.155~156)


  문지 에크리가 첫 번째 생산한 네 권의 저자는 김현, 김혜순, 김소연, 이광호이다. 여기서 김현은 시인 김현이 아니라 문지 4K의 한 명이었던 평론가 김현이다. 시인인 김소연의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는 우리가 희미하게 기억하는 사랑의 잊혀진 궤적을 구체적으로 훑는다. 또는 사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들에 촘촘하게 새겨진 사랑들을 뾰족하게 집어내기도 한다. 



김소연 /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 문학과지성사 / 225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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