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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표정훈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어떤 경지에는 아직이지만 어떤 지경에는 이미 충분한...

  책을 읽기 전에 책을 들고 그 표지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일반적인 책의 표지에서 느낄 수 있는 촉감이 아니었고, 이 감각을 어디에선가 느낀 적이 있기는 있는데, 하면서 책은 읽지도 않고 그렇게 있었다. 표지의 안쪽은 유광이고 겉쪽은 무광에 가깝기는 하지만 무광은 아니다. 억지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테블릿이나 폰의 케이스로 사용하는 어떤 재질을 닮아 있다는 것 정도이다. 


  “책과 한 몸이 되어버린, 아니 책이 되어버린 B는 책 내용이 온 신경과 세포가 되어 살아 있다는 느낌에 소스라쳤다. B는 이제 책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B가 다만 슬퍼한 것은 ‘한 책에 갇히다니, 아니 한 책이 되어버리다니’였다. B는 이내 자신이 즐겨 어루만지던 다른 책을 떠올렸다. 냄새, 색깔, 종이의 감촉, 디자인, 무게감, 크기와 모양, 글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맛.” (pp.28~29)


  이 책과 관련하여 굳이 (물리적인) 팁을 드린다면 기름기가 있는 음식의 섭취와 함께 독서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냥의 독서로도 손에 있는 기름이 책에 흔적을 남기기 충분한 재질이다. 잠깐의 독서만으로도 손때 (아니 손의 기름기) 묻은 책이 된다. 나는 이 책의 표지 재질과 작가의 의도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오감을 이용한 독서가 저절로 시작되고 만다.


  “이렇게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나치게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책벌레라 이른다. 전통 동아시아에서는 서광(書狂), 서치(書癡), 서음(書淫), 서전(書癲) 등으로 일컬었다. 서양에서는 서적광, 애서광 등으로 풀이되는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이 말은 영국 의사 존 페리어가 처음 만들어 썼고, 1809년 토머스 딥딘이 펴낸 《비블리오마니아 또는 서적광(bibliomania; or Book Madness)》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퍼졌다.” (p.70)


  책을 쓴 표정훈은 이미 《탐서주의자의 책》이라는 제목을 지닌 책을 쓴 애서가이며, A.J.제이콥스의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을 번역한 바 있는 방대한 지식습득자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가 이번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넉넉하게 배경으로 삼아 마음껏 상상력의 붓질을 하고 있다. 그렇게 매 챕터마다 한 편의 그림이 있고, 여러 권의 책들이 등장한다. 


  『타악(打樂)의 명인 흑우(黑雨) 김대환이 말했다. “모든 박자는 일박(一拍)에 통섭(通涉)된다.” 중국 화가 석도(石濤)가 말했다. “어떤 그림이든 모두 일획(一劃)에서 시작한다. 이 일획이 억만 개의 필묵을 사용한다.” 글도 첫 일필(一筆)에 만필(萬筆)이 통섭되고 억만 개 문장을 수용한다. 생각이 나니 쓰는 게 아니다. 쓰니까 생각이 나고, 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써진다. 문장이 문장을 낳는다. 일필(一筆)로 벽을 차 부수는 수밖에 없다.』 (p.144)


  그리고 작가는 쓴다. 그림을 그린 작가가 살았던 시대, 그 작가가 교류한 사람들,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의 정체와 그 인물을 둘러싼 여러 사건 등을 총체적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거기 그림 속에 있는 책의 정체를 유추한다. 그림을 그린 이가 어떠했기 때문에 혹은 그림 속의 인물이 어떠했기 때문에 그림 안의 책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라고 넘겨짚는다. 그 과정이 곧바로 하나의 챕터가 된다. 


  “2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책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1만 5천 권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집안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대략이라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책 버리기는 책에 얽힌 추억과 경험을 지우는 일이기에 고통스럽다. 책 버리기는 그 추억과 경험의 짐을 덜어내는 일이기에 즐겁다.” (p.259)


  작가는 오랜 시간 문사철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고, 더불어 책 자체에 대한 탐닉을 숨기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여겨진다. 그것이 아직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떤 지경에는 충분히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책은 바로 그 지경에서 나올 법한 높이를 지니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넘치는 높이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모자란 높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유영하는 것만으로 나는 일단 편안해진다. 



표정훈 /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한겨레출판 / 292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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