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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일상에 대한 소소한 이해들이 모여서 자꾸 좋은 방향으로...

*2019년 6월 3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어느 새 유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 해의 정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한 해의 전반이 곧 끝나고 후반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날에 평화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수영을 하러 들어가기 전에 대통령을 태운 헬기가 비무장 지대를 향하였고, 수영을 하고 나왔을 때 짧은 대화가 아닌 회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설마’의 마음이 좋은 방향으로 일단락되었다. 아내의 수영 실력도 좋아지고 있다.


  “무엇이든(행동이든 결과든 선택이든 과정이든) 적당한 거리에서 숨쉬듯 받아들이는 자세, ‘되는 대로 즐겁게’ 해보려는 자세가 좋다. 숨쉬듯 자연스럽다는 것.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 군대에서나 통용될 법한 이 말은 끔찍하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다 인생을 망친 설마들이 얼마나 많은가...” (p.29)


  박연준의 시를 입은 크게 벌리되 소리는 들리지 않는 절규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최근의 시에서는 그 벌린 입으로부터 솔솔 바람이 불어져 나오는 것도 같았다. 어디 아픈 데가 있으면 그 앞에다 두어도 좋겠다, 싶었다. 박연준의 산문은 산문대로 좋다. 얌전하여서 그 산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고, 그 얌전 앞에 있으면 나도 저절로 얌전해지는 것만 같다. 얌전하지만 약하지 않은, 신통한 힘도 있다.


  “비가 왔고 다시 날이 갰고 나뭇잎이 흔들렸다. 먼 곳에서 온 당신은 내 발가락 끝으로 들어와 동그란 무릎에 오래 머물다 머리카락 끝으로 빠져나갔다. 무릎이 멍든 이유는 당신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믿어본다. ‘멍이 들다’는 말의 중심을 통과하다 발목이 꺾인다. 멍은 드는 것이로구나. 나뭇잎이 물들 듯, 우리가 서로를 예뻐하면 곳곳에 서로의 물이 들 듯, 멍도 내 몸에 드는 일이구나. 멍이 들거나 상처가 생기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 모른다.” (p.77)


  그 힘이 그저 헛되기만 한 힘은 아니어서 안도하게도 된다. 작은 것과 무른 것과 나이 든 것과 힘없는 것을 향해 보내는 시선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안심한다.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무언가를 내리 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리 눌러진 것에 뾰족하게 바람을 넣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한다. 크게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넌지시 상대방에게 힘을 보내는 것 같다. 덩달아 힘을 내고 힘을 보내고 싶어진다.  


  “... 도대체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하는데, 고생하는 사람들의 임금은 왜 이리도 작은 것이며,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왜 이렇게 형편없이 낮은 것일까? 어린 학생들은 커서 열심히 야근하고, 더 각박하게 살기 위해 학원에 가 영어단어를 외워야 하는 것일까? 왜 아무도 어린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방법 따위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어른의 잣대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만 가르치는 것일까?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은 왜 좀처럼 미간을 펴고 미소를 짓지 못할까? 왜 한결같이 지친 표정으로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 액정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pp.115~116)


  그 힘들을 길어 올린 심원이 소소한 일상들이어서 반갑기도 하다. 어떤 거창한 현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어떤 하찮은 일상으로부터 비롯된 생각들이어서 더욱 믿음이 가는 구석이 있다. 나는 여전히 거대한 패러다임의 이해를 꿈꾸고 있지만 그 이해가 일상의 요령부득으로 이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나는 그 반대가 좋다. 일상에 대한 작은 이해가 모여서 거대한 것을 향한 반격이 이루어지길 원한다.  


  “... 누가 누구를 더 잘 아는 것(그것도 불가능하지만 안다고 치고), 그게 권력이 될 수 있는가? 아는 게 권력이란 생각은 착각이다. 굳이 권력을 논하자면 사람을 아는 게 권력이 아니라 끌어안는 게 권력이다. 그 사람을 끌어안고, 품고, 아끼는 것. 그때야 그 사람에 대한 지분이 생기고, 무언가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그때 권력은 무지막지한 힘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풀고 풀밭에 드러누워 기다리기’와 같은 권력이다.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고독에 대해, 당신에 대해 내가 다 알지 못하더라도, 혹은 조금 안다 해도 ‘알은체’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권력. 절대 권력이지.” (p.179)


  일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반격들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위의 ‘권력’에 대한 글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것을 나도 갖고 싶구나 하는 마음이 되었다. 이 ‘절대 권력’은 막강한 힘이 저절로 만들어내는 권력이 아니라 마땅한 노력으로 얻은 뒤에도 쉽사리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힘이, 힘주어 만들어내는 권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오늘, 최대한 화면 뒤에서 만들어낸 대통령의 힘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으리라고 여겨본다. 맞다, 어떻게든 가져다 붙여보고 싶었다. 



박연준 /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 달 / 299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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