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이 결여된 움직임, 내적인 움직임, 가만가만한 움직임...
글을 쓸 때 나의 약점은 명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명사 중에서도 보통 명사 보다는 고유 명사를, 추상 명사 보다는 구체 명사를 많이 사용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나는 형용사로 요령껏 덧입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부사로 한 번 더 한껏 꾸미고는 한다. 내가 고유의 명칭을 생각하지 못하여 어정쩡한 대명사로 지시할 때마다 아내는 나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 브라운은 일체의 인식이 뚫을 수 없는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무지의 심연 속에서, 짙은 그림자 안에 침잠해 있는 세계의 건물 속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빛의 조각들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질서를 탐구하지만, 그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브라운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오로지 소문자로만, 덧없는 자연의 약어와 약칭으로만 써야 하며, 오직 이것들만이 영원의 여운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p.29)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발트를 읽는다면 바로 이 책부터, 라고 생각한 것이 《토성의 고리》였다. 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의 원제가 Under the Sign of Saturn 이었고,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에 토성 주민이 등장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딱히 ‘토성’에 대한 나의 독서가 연고가 없는데, 어쩌다 그런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책의 뒷면에는, ‘제발트’라는 우주를 향해 여행을 시작하려는 당신을 위한 최고의 안내서, 라는 각인이 있다.
“... 서양메꽃은 덤불의 목을 조르고, 쐐기풀의 노란 뿌리는 땅속에서 앞으로 기어나가고, 다년초 덩굴들은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고, 갈색 반점세균과 진드기가 번져가고, 끙끙대며 단어와 문장을 병렬해놓은 종이조차 진딧물이 짜낸 감로로 칠한 것처럼 느껴지네. 몇날 몇주 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짜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다네. 아마도 우리 문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써나갈수록 전체적인 조망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낸 정신적 구성물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을 인식이 발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일 텐데, 실은 우리의 길을 실제로 지배하는 예측 불가능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예감하고 있네...” (pp.213~214)
《토성의 고리》는 읽기에 어려운 책이지만 꼭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읽기에 어려운 것은 무수히 많은 고유 명사들이 등장하는데 그 고유 명사가 지시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장소나 사건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어렵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은 고유한 것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제발트의 무엇을 포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내 머릿속에는 단 한점의 생각도 없었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마다 내 안의, 그리고 내 주위의 공허가 커졌고, 정적은 깊어졌다. 길가의 작은 풀다발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토끼 한 마리가 바로 내 앞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을 때 내가 거의 죽을 만큼 놀랐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텐데, 처음에 허물어지는 궤도를 다라 달리던 토끼는 한두번 방향을 바꾼 뒤 다시 들판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토끼는 내가 다가오는 동안 미칠 듯 뛰는 심장을 안고 목숨을 구하기에는 거의 너무 늦은 시점이 될 때까지 몸을 웅크린 채 꼼짝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덮친 마비상태가 경악의 동작으로 이어지던 바로 그 찰나, 그의 공포가 나를 관통해 지나갔던 것이다. 나는 일초의 몇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이 짤막한 공포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지금도 생생하게, 나의 평소 인식능력을 초과할 만큼 명료하게 떠올릴 수 있다. 회색 아스팔트 길의 가장자리, 풀줄기 하나하나를 떠올리고, 귀를 뒤로 젖히고 공포로 표정이 굳은, 어딘가 갈라진 듯하고 기묘하게 인간과 닮은 얼굴을 가진 토끼가 은신처에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도망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공포로 거의 머리에서 빠져나올 듯한 토끼의 눈을 보고, 그리고 토끼와 하나가 된 나 자신을 본다...” (pp.275~276)
옮긴이는 그것을 ‘영국 순례’, ‘미로’, ‘파괴의 역사’, 멜랑꼴리‘로 정리하여 책의 뒤편에 덧붙였다. 내게는 그것이 ’고유 명사‘, 끊임없는 서술’, ‘예측 불가능성’, ‘포착된 혹은 봉인된 시간’ 등이었다. 작가는 책 안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행동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것을 두고 가만히 움직인다, 라고 명명해본다. 움직임이 결여된 움직임이고, 그것은 내적 움직임이다.
“... 1807년,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으로 오랜 여행을 다녀온 뒤 그는 오네 부락에서 멀지 않은 라발레오루(빠리 남쪽 근교)의 숲으로 덮인 언덕들 사이에 숨어 있는, 정원이 딸린 작은 집을 샀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기억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이 기록은 그가 직접 심어 하나하나 정성껏 가꾸는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무들은 아직 너무 작아서 내가 나무와 태양 사이에 서면 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워준다. 하지만 후일 다 자라고 나면 나무들이 내게 그림자를 돌려줄 것이며, 내가 나무들의 유년시절을 돌봐주었던 것처럼 나무들은 나의 노년시절을 돌봐줄 것이다...” (pp.308 ~309)
제발트를 지적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네 권의 소설을 남기고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제발트의 소설이 내게는 아직 세 권 남아 있다. 책을 소리 내어 읽지는 않지만 제발트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은 종종 길을 잃어버리는 수런거림으로 가득차고는 한다. 이 단순하지 않은 수다의 종적을 되새김하다보니 독서의 시간이 자꾸 지연된다.
W. G. 제발트 / 이재영 역 / 토성의 고리 (Die Ringe Des Saturn) / 창비 / 357쪽 / 2011, 2019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