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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8. 2024

권여선 《각각의 계절》

넉넉하지 못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구석구석... 

  「사슴벌레식 문답」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pp.21~22) 대학 신입생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룸메이트를 하며 시간을 함께 하였던 네 명의 친구인 정원, 준희, 부영, 경애... 하지만 정원은 죽었고 부영과 경애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술에 취해 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지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p.36) 별다른 모순 없이도 무엇이든 뚫고 나갈 수 있던 젊은 시절의 그들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그들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실버들 천만사」

  결혼식날이었지만 진행이 되지 않았다는 딸 채운의 말에 엄마 반희는 깜짝 놀란다. 이혼한 엄마는 혹시 딸의 결혼식 날이었는지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혼한 남편의 틀어진 결혼식 날이었고 엄마 반희와 딸 채운은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서로에게 ~씨를 붙였다가 나중에는 남편과 아들, 아빠와 오빠에게까지 ~씨를 붙이는 이 모녀의 기명 방식이 입에 착 붙지는 않는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게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pp.113~114) 지주 집안의 오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고 숨어서 공부하였고 파독 간호사를 지원했고 그곳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마리아가 일흔두 살에 죽었다. 소설은 마리아가 떠난 후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당 모임의 일원들, 그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대비되는 마리아의 드러나지 않았던 선량함을 다루고 있다.


  「무구」

  “... 현수도, 땅을 판 주인도, 소미의 집마당을 가로지르며 묘역 얘기를 한 늙은 여자도, 땅을 사겠다고 나온 늙은 남자도, 그를 외지인이라고 속인 중개사도 모두 미친 사기꾼들 같았다. 애초에 그 땅은 무구하지 않았다. 손을 탔고 때를 탔다. 아니, 아니, 소미는 고개를 저었다. 땅은 잘못이 없었다. 소미는 그 땅의 구무함을 믿었다. 소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땅을 팔지 않겠다고, 거두어들이겠다고 말했다...” (p.137) 대학 동창 현수를 우연히 만나, 그녀를 통해 소미가 땅을 살 때까지만 하여도 무구하지 않은 부동산 투기의 일화를 다루나 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가서, 현수는 떠났고 소미에게 남겨진 땅은 금싸라기가 되었다. 소미는 넉넉한 노후를 누리고 있고 현수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같다.

 

  「깜빡이」

  자매인 혜영과 혜진이 어머니 신숙과 이모인 신애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신애는 약속 장소를 못 찾겠다며 전화를 걸어오고, 결국 신숙과 두 딸만 함께 식사를 한다. 신애는 엉뚱한 곳에서 남편에게 발견되었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전생에 진 빚 원채... 가족들과의 관계에는 희노애락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결국 혹시 이건 어떤 원채의 결과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모두에게 그런 순간이 있을 것만 같다.


  「기억의 왈츠」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p.218) 그때 그 시절 경서는 왜 내게 자신의 일기를 툭 던지고 말았을까, 그때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던져진 일기를 모르 척 하고 말았을까... 잊은 줄 알았던 숫자 그리고 날짜의 기억, 그 기억이 왈츠의 스텝을 밟는다고나 할까. 



권여선 / 각각의 계절 / 문학동네 / 271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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