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장편 《레몬》은 한 소녀의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이 그 죽음을 따라가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에 발생하였고, 그때도 그 이후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 그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사건만큼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도 없다. 꼼짝않고 있는 그 사건이 남은 사람들의 삶을 크게 움직이도록 만든 것일 수도 있다.
“... 나는 이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 삶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p.35)
그 미제 사건의 중심에는 해언이라는 고등학생의 죽음이 있다. 노란 색 원피스 차림의 두부 손상, 속옷은 없었지만 성폭행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은 사체로 남겨진 해언에게는 동생인 다언이 있었다. 해언과 같은 반인 상희도 있었고, 상희는 문예반의 다언에게 좋은 선배 언니이기도 했다. 소설은 주로 다언과 상희의 내레이션으로 흘러가고, 사건은 한만우와 윤태림의 고백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p.77~78)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여러 인물의 시점을 교차시키는 진행 방식은 소설의 미스터리한 측면을 부각시키는데 유효해 보인다. 하지만 그 시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미스터리를 해결하게 되는, 미스터리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지는 않다. 사건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윤태림의 병적인 자기 고백에 의지하고 있을 뿐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는 없겠다.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p.179)
사건의 당사자인 해언, 그리고 그 해언의 동생이면서 해언의 죽음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다언의 반대편에는 가해자인 윤태림과 신정준이 있다. 그리고 윤태림을 흠모하였던 한만우나 다언의 선배인 상희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다언은 한만우와의 만남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윤태림과 신정준이 이루어낸 가족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강탈함으로써 자신을 또 다른 죄의식의 한가운데로 몰아간다.
“이제 그들은 죽고 없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p.199)
생각해보니 소설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자기 고백 혹은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한만우는 형사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다언에게 진술하거나 고백한다. 다언은 우연한 순간에 마주치게 되는 상희에게 고백하고, 윤태림은 상담사와 박사에게 고백한다.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피해자인 해언과 죽음의 가해자인 신정준이다. 삶과 죽음과 생명이 그 고백들의 사이사이에서만 성장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작가의 고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