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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8. 2024

김훈 《연필로 쓰기》

어두운 심연에서 사색한 연후에야 아주작은 빛만으로도...

 책의 시작 ‘알림’에 ‘나는 여론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붙어서 편을 끌어모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글귀가 들어 있다. 자신의 원함이나 원하지 않음과는 무관하게 세간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을 심심치 않게 겪어야 하는 이의 마음이 거기에 있고, 그 마음은 꽤 늙은 마음이기도 하다.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젊은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고, 늙은 사내는 늙은 아내가 탄 휠체어를 밀고 간다. 20년 전에 지나가던 노인들은 다 지나가고 지금은 딴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고 지나간다.” (p.36)


  김훈의 나이가 칠십이 넘었다고 아내에게 말하니, 아내는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며 놀란다. 내가 먼저 놀란 다음이었다. 계간 《문학동네》에 그의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이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 1994년이니, 작가의 길에 접어든 지도 벌써 이십 오 년이 지나갔다. 그의 소설과 그의 산문과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나의 시간도 그만큼 흘러갔다.


  “... 권세와 이윤이 유일신으로 지배하는 시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세월호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돌아다니는 이 세월호들 위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 물에 빠진 세월호만 세월호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더 크고 더 썩은 세월호였으니, 세월호가 어찌 세월호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p.93, 한겨레 2017년 4월 13일)


  솔직히 말하자면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동시에 깊이 있는 시대의 대변자를 겸할 수 있는 이가 흔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내가 지지하는 진영을 지지하는 그의 발언을 기대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말하는 대신 깊이 가라앉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렇게 충분히 어두운 심연에서 사색한 연후에야 아주 조그만 빛을 발설할 뿐인데, 그래서 그 빛이 더욱 환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물타기’는 대한민국 국회의 연금술이다. 경제 사회 문제나 예산, 입법에 관한 문제보다도 정치행위의 과오를 따질 때, 당파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 고위공직자의 개인비리가 돌출할 때 물타기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전개되는 까닭은 물타기의 이 연금술적 위력 때문이다. 지금 물타기는 법리나 논리, 다수결의 원칙 혹은 국회선진화법보다도 월등한 충돌 억지능력과 분쟁 조정능력을 발휘한다. 물타기로 싸움의 포인트를 흐려놓으면 그 상대 쪽도 결국은 물을 탈 수밖에 없어서, 물타기는 일단 죽기 살기의 외양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은 함께 사는 결과로 끝난다. 물타기는 교전 쌍방 모두의 생존술이며 오염수 속에서의 평화공존이다. 이 연금술은 오래된 경험의 축적과 싸우는 듯하다가 섞어버리는 세련된 정치기술이 있어야 하고 오염된 물의 수량水量이 풍부해야만 시술을 할 수 있는데, 대한민국 국회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 (pp.332~333)


  스스로는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해 말하려 한다고 밝혔지만 산문집의 글들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키고, 현실과 문학을 연결시키고, 도시와 시골을 연결시키고, 사람과 동식물을 연결시키고, 젊음을 늙음과 연결시키고, 태극기와 촛불을 연결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7천 년 전의 암각화에서 연원한 그의 글은 2019년의 ‘국토가 찢어진 틈새’로까지 흐른다. 


  “오이지는 채소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반찬이다. 오이와 물과 소금이 재료의 전부이고, 양념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무말랭이는 무를 햇볕에 말려서, 섬유질의 뼈대만을 가지런히 챙기는 반찬이다. 무와 햇볕이 재료의 전부다. 무말랭이는 이 본질이 너무 가파르니까, 참기름, 깨소금, 간장, 고춧가루로 무쳐서 밥상에 올린다. 오이지는 오이와 소금이고, 무말랭이는 무와 햇볕이다.” (pp.216~217)


  그 사이에 무와 햇볕을 연결시킨 무말랭이 이야기가 반짝였고, 나는 얼른 그것에 현혹되었다. 무말랭이를 씹으며 ‘가을햇볕의 맛’을 떠올리는 그를 당장에는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고약하고 성깔 있으며 만사 귀찮다는 노인의 표정을 지닌 채, 일산 호수 공원에서는 어린 소년에게 ‘산신령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의 늙음을 지켜본다. 그는 어쨌든 견디는 것 같고, 나 또한 견디는 그를 지켜보며, 당장에는 더디기만 한 늙어감을 견디는 중이다. 



김훈 / 연필로 쓰기 / 문학동네 / 467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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