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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8. 2024

김한민 《아무튼, 비건》

긍정이든 부정이든 비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이 궁금했다. 작가가 비건이 되려고 작정을 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2010년 돼지 살처분이 있었을 때, 그 도살에 참가하였던 한 공무원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었다. 그 공무원은 땅에 파묻었던 수천 마리 돼지들 중 그곳을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던 한 두 마리의 돼지가 낸 소리, 그 소리에 반응하여 다시 그 돼지들의 두개골을 내리쳐야 했던 지시 사항, 이후에 품어야 했던 자괴감에 대한 글이었다.


  “어느 인류학자는 서양인은 목적 지향적이고 동양인은 관계 지향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현대 한국인은 ‘이해관계 지향적’이라고. 잘해줘 봤자 즉각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는 남은 무성의하게 대해도 되는 분위기이다.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인심이 좋아든 이것이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며, 우리 사회가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등 소수자나 약자를 바라보는 평균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형편이 어리니 동물 ‘따위’야 남 중에서도 가장 뒷전으로 밀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가장 타자화된 타자, 남 중의 남. 그래서인지 나는 수많은 타자 가운데서도 동물에 가장 마음이 간다.” (pp.13~14)


  그 이후 작가는 ‘돼지고기 따위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다짐하였고 시간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이제 ‘96퍼센트쯤 비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 아닌 남, 우리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는 온전한 타자, 그 타자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돌아보게 되는 육식의 재료들인 동물들에 대해 작가는 생각한다. 타자화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그 타자화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하위 단계에 위치해 있는 동물을, 포식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으려 애쓴다.


  “참 싫은 건강도 있다. 가령, 맹목적인 건강이 대표적으로 싫다. 오직 건강만을 지상 목표로 삼아, 그에 벗어나는 일체의 행동을 두려워하는 결벽증적인 건강 추구는 질색이다. 한마디로 불건강한 건강이다. 내 몸, 내 건강만 챙기는 이기적인 건강도 비슷하다. 몸에 좋다면 남은 얼마든지 희생당해도 좋고, 주위가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가 어찌 건강일 수 있을까. 이것도 굳이 건강이라면, 나는 ‘추한 건강’이라고 부르겠다.” (p.35)


  나는 고기를 즐기는 타입이지만 주변에 고기를 즐기지 않는 타입의 사람들이 없지 않다. 아내는 아주 드물게 육식을 하고, 육식을 하는 경우에도 아주 짧게 한다. 후배 중 하나는 육식을 섭식할 때의 식감을 참을 수 없어 육식을 하지 않는다. 선배 중 한 명이 소심한 비건이라고 여겨지는데, 아마도 그녀의 이유가 이 작가의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딱히 이유를 밝힌 적은 없지만 그렇게 넘겨 짚는다.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온갖 문제점을 알지만 그 시스템에 너무 젖어 있어서, 지구의 멸망은 상상할 수 있어도 자본주의의 멸망은 상상하지 못한다고. 상상력이 부족하면 변화에 회의적으로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할까 봐 가장 두려운 듯하다. 그들은 종종 비건들에게 따져 묻는다. “모두가 비건이 되면 그 많은 가축들은 어쩌냐, 일대 혼란이 일어날 거다. 축산업계 종사자들의 생계는 어쩔 셈이냐?” 당치도 않은 걱정들이다...』 (pp.41~42)


  그 선배의 태도를 알고 있어서, 함께 모임을 하는 경우가 있을 때 구성원들이 나름 배려를 하곤 하는데, 구체적이거나 집요하지는 않다. 자신을 위한 배려에 예민한 선배 또한 그러한 배려를 크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냥 알아서 묵묵히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해 간다. 사실 우리 사회는 아직 편안하게 누구나 비건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비건인가? 그렇다, 아주 자랑스럽게. 그런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 완벽함이라는 잣대를 가져다대면 아마 대략 96퍼센트쯤 비건일 것이다. 자의적인 의미에서 비건인 셈이다. 그렇다고 플렉시테리언(flextarian, 어쩌다가 채식하는)이나 줄이기주의자(reducetarian, 육식을 줄이는), 비덩주의자(덩어리 고기는 안 먹는)는 아니다... 현재 나와 있는 용어 중에선 비건이 내가 지향하는 바와 가장 가깝다. 한마디로 비건은 나의 목표이고, 나의 현재 스코어는 내가 도달하고 싶은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p.47)


  책에 실린 ‘반응들’이라는 챕터가 있는데, 비건을 향한 공격적인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논거들이 들어 있다. 주변의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을 향해 한 번 쯤 던져본 질문 혹은 던지지는 못했지만 생각은 해봤던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들을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챕터 ‘정보들’에는 비건과 관련한 그리고 동물과 관련한 영상 및 책자가 소개되어 있다. 아직 그 영상들을 찾아서 볼 용기까지는 차마 내지 못하고 있다. 


김한민 / 아무튼, 비건 / 위고 / 173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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