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전히 질문 중이고, 여태 답변 중인 뭔가의 집합...
책은 열 개의 단편으로 채워진 소설집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연작 소설이면서 하나하나의 완결된 단편이기도 하고, 그저 챕터가 나뉜 채 한 명의 주요인물과 하나의 서사로 연결되는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 형태의 소설집 혹은 한 권의 소설을 근래에 몇 권 읽었는데, 모두 여성 작가들의 것이었다는 (그리고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어쩌면 최근 백여 년의 시간들이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변혁적이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이런 상태에서는 사건과 가능성들이 멋진 단순성을 띠게 된다. 선택은 자비로울 만큼 명백하다. 어물쩍 얼버무리는 말은 전혀, 조건을 붙이는 말은 거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결코’라는 단어가 갑작스레 확고한 권리를 얻는다. 그들과 결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증오가 담기지 않은 눈길로는 결코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벌할 것이고 끝장내버릴 것이다. 이러한 결의와 온몸의 통증에 감싸인 채로 그녀는 자기 자신도, 책임도 초월하는 묘한 편안함 속에 둥실 떠 있다.” (p.39, <장엄한 매질> 중)
로즈는 아주 어릴 때 낳아준 엄마를 잃었다. 그래서 로즈에게 엄마는 새엄마인 플로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로즈의 집을 겸하는 상점은 핸래티와 웨스트핸래티 중 웨스트핸래티에 속하는 곳에 있다. 가난한 시골 동네인 핸래티의, 그리고 더 가난한 동네인 웨스트핸래티의 생활은 척박하고, 로즈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웨스트핸래티가 아니라 핸래티에 속한다는 일종의 환상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로즈의 아버지는 때때로 심한 매질을 하고는 했는데, 매질 후의 로즈의 심상을 표현하는 문장에서는 앨리스 먼로의 섬세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았고 이내 이상할 정도로 행복해졌다. 플로가 뒤로 물러나고 웨스트핸리티가 날아가듯 멀어지며 그녀 자신의 피곤한 자아도 다른 모든 것처럼 쉽사리 버려지는 느낌이었다. 갈수록 낯설어지는 타운들이 너무나 좋았다. 한 여자가 기차 안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봐도 상관없다는 듯 잠옷 차림으로 자기 집 뒷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대설大雪지대를 벗어나 봄이 더 빨리 찾아오고 풍경이 더 부드러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뒤뜰에 복숭아나무를 기를 수도 있었다.” (p.112, <야생 백조> 중)
아직 어린 소녀였던 로즈가 시골 동네를 잠시 떠나는 순간에 품는 마음의 결은 바뀌어가는 기차 창밖의 풍경에 고스란히 겹친다. 핸리티를 벗어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질시와 구설을 벗어나기 힘든 촘촘하고 무성한 소문들을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원행이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목사인 듯 목사가 아닌 듯 한 남자의 성추행을 묵묵히 감내하였던 소설 속 일화는 이후의 로즈의 삶을 짐작케 한다.
“... 헨쇼 박사는 가난을 그저 불우함이나 결핍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가난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흉한 막대기 모양 전등을 사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도 때도 없이 돈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새로 산 물건을 놓고 악담을 하며 그것을 공짜로 얻은 건지 아닌지 입씨름하는 것을 의미했다. 플로가 정면 창문에 사서 단 비닐 커튼이나 가짜 레이스 따위를 두고 자부심과 질투가 난무하는 것을 의미했다...” (p.131, <거지 소녀> 중)
대학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전혀 다른 계급의 남자 패트릭을 만나게 되면서 로즈의 삶은 다시 한 번 휘청거린다. 패트릭은 로즈의 배경이 되는 가난한 삶이 믿기지 않고, 로즈가 방문한 패트릭의 부유한 본가는 리얼하지 않다.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곧 필연이 되기도 한다. 결혼을 앞둔 로즈의 불같은 낙담 속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 패트릭은 좋은 사람이었다. 좋지 않은 것은 그의 견해일 뿐, 사람 자체는 좋았다. 패트릭의 본질은 단순하고 순수하고 신뢰할 만하다, 로즈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주기는 고사하고 그녀 자신이라도 확신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p.201, <장난질> 중)
결국 로즈는 패트릭과 헤어진다. 그 헤어짐에는 친한 친구의 남편인 바이올린 연주가 클리퍼드가 있지만 온전히 그것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로즈는 곧이어 딸인 애나와도 헤어지게 된다. 이후 톰 그리고 사이먼 등과의 길거나 짧은 관계가 있지만 로즈는 결국 크게 성공하지 못한 배우의 길을 걸으며 외로이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로즈의 옛 동네 핸리티에는 플로가 남아 있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52,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중)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플로는 온전치 못한 정신을 지닌 채 로즈에 이끌려 요양원에 들어간다. 로즈가 방문한 핸리티는 여전한 듯 여전하지 않고, 거기에는 로즈의 과거가 로즈가 아는 과거의 인물들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시 한 편을 순식간에 외웠던 로즈에게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물었던 선생은 이제 죽고 없지만, 그 말만은 여전히 남아서, 로즈에게 여태 질문 중이다.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 민은영 역 / 거지 소녀 (The Beggar Maid) / 문학동네 / 387쪽 / 2019 (1977,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