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들은 노년에도 넘치고...
2010년 팔십 세가 되었을 때 어슐러 르 귄은 블로그를 시작한다. 원래 작가는 블로그와 같은 ‘쌍방향적’인 매체에 그다지 흥미가 있지는 않았다. 이상한 것은 책의 내용 중에서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에 답장을 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쨌든 블로그는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슐러 르 귄은 주제 사라마구의 블로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슷한 무언가)를 보고는 ‘나도 이렇게 해볼까’ 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했다.
“파드가 집에 왔다는 소식을 쓴 이후로 넉 달이 지났고 ‘꼬마 파드’는 장성하여 ‘거대하진 않지만 제법 튼실한 파드’가 되었다. 코비에 속하는 고양이 종인데 다리는 길지 않다. 꼿꼿이 앉아 있는 모습을 뒤에서 보노라면 기분 좋은 대칭의 달덩이 같은 구가 검게 빛난다. 거기에 머리와 꼬리가 붙어 있다. 뚱뚱하진 않다. 하지만 살찌려는 의지가 부족한 고양이도 아니다. 여전히 사료를 너무나 좋아한다.” (p.51)
그러니까 책은 작가가 여든 살이 된 2010년에 시작한 자신의 블로그 내용에서 발췌된 것들이라고 짐작된다.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의 상태이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노년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작정을 한 작가의 또 다른 선택지였으리라.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는 고양이 파드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챕터의 말미에 ‘파드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작가가 쓴 거대한 각종 연대기 서사에 비해 무척 소박한 분량이라 아쉽다.
“인간과 개는 삼만 년에 걸쳐 서로의 성격을 맞추어 왔다. 인간과 고양이가 함께 맞추어 온 기간은 그에 비해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우리는 아직 초기 단계다. 아마 그래서 우리의 관계가 이처럼 흥미로운가 보다.” (p.234)
나머지 내용들은 블로그에 실린 글이라고 하여도 꽤나 묵직하다. 첫 번째 챕터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과 그 받아들임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면 두 번째 챕터는 문학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름 밝히고 있다. (위대하지만) 장르 소설의 작가인 본인의 지점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여러 개의 글이 실려 있다. 스토리와 플롯에 대하여 쓰고 있는 아래의 내용이 눈에 가장 들어왔다.
“... E. M. 포스터는 스토리를 낮잡아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여왕이 죽었다. 그리고 나서 왕이 죽었다.’를 스토리라고 할 때 ‘여왕이 죽었다. 그러자 왕이 심심하여 죽었다.’는 플롯에 해당한다. 그가 볼 때, 스토리는 단지 ‘이런 일이 생겼고 이렇게 되었고 이 다음에는 이렇게 되었다.’의 인과 없는 연쇄 이야기이다. 반면 플롯은 인과나 개연성을 통해 이야기에 모양과 형태를 부여한다. 플롯이야말로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평이다.
E. M. 포스터를 존경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에서 포스터가 말하는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벌이를 위해 쓴 정말 터무니없는 ‘액션’ 소설조차도 인과 없는 사건들의 나열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는 스토리의 가치를 높이 산다. 스토리에서 서사의 필수적 궤적을 본다. 일관성, 이야기의 진전, 여기에서 저기가지 어떻게 독자를 이끄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볼 때, 플롯이란 이야기의 움직임이 보여줄 수 있는 변화나 복잡성이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플롯은 진행에 정교함을 부여한다.“ (pp.119~120)
세 번째 챕터로 넘어가면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의 페미니즘과 현재의 페미니즘 등을 향한 자신의 생각을 보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국가 그리고 현대 사회가 가지는 약점을 바라보고, 그것을 에둘러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시점이 되어 말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이 되었어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작가는 존재한다, 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 여성의 주체성과 상호의존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남성 및 남성 지배의 혜택을 받는 여성들의 조롱 섞인 증오에 직면한다. 여성 혐오는 결코 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남자들만큼, 혹은 남자들보다 더 강하게 스스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한다.” (p.160)
기억하기로는 작가의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판타지 소설과 과학 소설, 장편과 단편, 어린이용 책과 산문집 등 무수한 책을 써낸 작가임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 판타지 세계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고,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고 널리 읽히도록 만드는 일의 위대함은 잘 아는데도 그렇다. 영화화된 판타지 소설을 보는 것은 꽤나 즐기는 편인데 판타지 소설 자체를 읽는 것에는 아직 재미를 붙이지 못한 탓이다.
어슐러 K. 르 귄 Ursula K. Le Guin / 진서희 역 /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No Time to Spare : Thinking About What Matters) / 황금가지 / 322쪽 / 2019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