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영화와 진해와 대화와 의식과 사소설과 오토 픽션이 발가벗고...
「컬리지 포크」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소설을 쓰던 중 그와 그에 대하 기억을 떠올리다. 여전히 형섭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에하라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도 깨달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아쉬워한다. 글을 쓰던 어느 날, 형섭이 쿠마를 내게 안겨주고 떠났을 때 눈물을 쏟게 될 것이다. 한동안 나는 쓰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때, 당신의 사진을 보았던 날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를 가장한 흥분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p.49) 에하라 선생과 나 사이의 한 여름의 혼곤한 관계도 관계이지만, 문장 사이를 휘청휘청 건너다니는 시간의 널뛰기에 더 주목하게 된다. 쓴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사이로만 흐르는 강의 이름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고...
「여름, 스피드」
“영화를 만들기 직전 나는 B가 소개시켜준 갓 등단한 신인 소설가와 사귀고 있었다. 얼굴도 잘 생겼고 몸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말이 잘 통했고 동류의식이 있어 좋았다. 하지만 때론 나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섬세하고 예민한 자아를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강렬한 동시에 정교했다. 반짝거리는 위악과 피해 의식과 불필요한 통찰력은 작품에서만 발휘했으면 좋았을 것을, 견디다못한 나는 쓸데없는 꼬투리를 잡아 그와 헤어졌다. 하지만 내가 차놓고도 그에게서 벗어나기는 좀 어려웠다. 그리하여 나는 그 남자와의 일을 고스란히 그의 시점으로 바꾸어, 의문의 이별을 당하는 게이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그게······ 터졌다...” (p.59) 그렇게 덕분에 나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영화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학교를 다닐 때 잠시 만나고 헤어졌던 영우를 만나게 되는데... 영우와 영화를 만드는 나와 게이 소설가인 그와 소설을 쓰는 작가까지 한 명의 인물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가, 아니지 아니지 영화를 만드는 나와 게이 소설가인 그까지는 한 명의 인물이지만 영우는 또 다른 인물이라고 봐야겠어 하다가...
「디스코 멜랑콜리아」
“너무 좋아서 광대가 아플 지경인데 그렇게 한껏 좋아지는 기분 가운데 그의 뒷모습을 본다. 어, 내 옷을 입은 당신이 저기 걸어간다. 내 옷을 입은 남자를 보는 건 언제나 행복하게 야릇하고, 이 숨막히게 덥고 사람으로 가득찬 광장 속에서 오직 아는 사람이 너뿐이라는 사실이 어이없게 든든한데 그가 다시 돌아 손을 흔드는 모습을 나는 언젠가 보았던 것만 같고, 그건 반복되는 토포스거나 사실 나는 당신을 이미 마흔 번쯤은 사랑해본 적이 있는 것이고, 어제나 기대했던 기시감으로 넘쳐나는 지금 이 순간, 그런 기시감과 패턴만을 사랑해왔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사랑해버린다.” (pp.119~120) 테드가 모는 85년식 픽업으로 시작해서 남산과 아마도 진해라고 여겨지는 곳,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을 디스코처럼 경쾌하게 넘나들다가 문득 멜랑콜리아...
「라스트 러브 송」
“상경 후, 내적 갈등을 끝낸 스물네 살 겨울 이후로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이 내가 게이라는 걸 지시하거나 게이가 아님이 아님을 지시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 (p.132) 그리고 이제 그 기쁨이 미지의 것이 아니라 실체하는 형을 통해 구현될 수 있겠다 싶은 순간 사라지게 되는 사랑, 그것은 이제 결코 투사될 수 없는 미래의 풍경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밝은 방」
“아무도 지금, 여기, 이곳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근데 그 진짜라는 게 어디에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없는데, 있고, 근데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져서 허무해지고, 그러다 터지는 농담 속에 살짝 떠다니는 통찰력 정도에 감탄하며 웃어젖혔고, 그래도 웃음이 좋고,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여기가 아닌, 다른-같은 곳을 보고 있고, 다시 한번 따뜻한 비난과 웃음, 그리고 이어지는 시무룩함에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나둘, 조금씩 말을 잃어갔다.” (pp.174~175) 달과 신지와 윤느와 레너드와 내가 펼치는 대화와 설명의 향연...
「Auto」
작가의 등단작인 셈이데, 이 안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를 스스로 규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나의 글’이라고 자신을 항변하는 부분에서 지금까지 읽은 다른 소설들이 떠오른다. 그런가 하면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라는 발표는 일종의 커밍아웃 같은 것일 게다. “오토픽션의 곤란함은 부끄러움과 그리 멀지 않다. 더 좋은 질료로 더 나은 가공을 할 수 있음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야 하는 피로함, 혹은 질료를 가공할 수 없다면 더 좋은 질료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의 무언가가, 내가, 기억될/할 만한 글의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의 곤란함이다. 다시 말해 쓰일 수 있을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한편, 소설에서 Auto와 Fiction은 정도의 차이일 뿐, 때로는 모든 글이 나에겐 오토픽션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나’가 쓰기에 Auto, 내가 ‘쓰기’에 Fiction.” (p.226) 다만 그의 소설을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과 같은 류의 오토 픽션으로 분류하기엔 아직 이르고 일본 사소설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낫겠다. 여기까지, 가 될 것인지 이제부터, 가 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김봉곤 / 여름, 스피드 / 문학동네 / 278쪽 / 2018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