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은 빛을 잃었지만 그 남겨진 흔적으로 운명은 계속되고...
《박하》는 허수경 시인의 장편 소설이다. 시인의 읽어본 적 없는, 세 번째 소설이다. 백여 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이별의 영역이 액자 소설이라는 형태를 띠고 공유되고 있다. 그 헤어짐은 눈물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말라 있는 탓에, 지금 여기를 공간으로 삼을 수 없다. 벼락처럼 달려드는 사랑은 사막의 공기를 닮아 있고 반짝이지만, 그 반짝임은 곧 빛을 잃고, 우리들은 그저 그 남겨진 흔적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 그냥 폭삭 늙은 것 같아서. 그 영화 볼 때 그런 사막에 가서 살아도 좋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렸어. 내 가슴이 사막이지, 뭐. 휴, 어쨌든 따로 사막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좋긴 하다. 그치?” (pp.13~14)
남편 이연과 아내 은수는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있는 평범한 부부이다.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연은 두 차례 여인을 만난 적이 있고, 아내 은수 또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다고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내색한 적은 없다.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만든 적도 없다. 그러나 어느 날 친정에 내려갔던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사고를 당했다. 차에 타고 있던 모두가 죽었고, 나는 그날 독일에 살면서 잠시 서울에 들른 마주니 형을 만나느라 죽지 않았다.
‘나에게, 내가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일 것이다. 너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p.28)
이제 내게 남겨진 것은 마주니 형이 준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이다. 마주니 형이 직접 번역한 기록의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일 것이다’ 라는 문장으로 인해 나는 이 기록물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기록물을 읽으며 독일을 향한다. 그곳에서 마주니 형을 만나고, 마주니 형의 여인 마리타를 만나고, 기록물 속의 이무와 이무의 연인 하남을 계속해서 읽는다.
“저는 바위에 새겨진 조각이었어요. 거기서 나온 지 3천 년이 지났어요. 하남이 멸망할 때 그 조각 안에서 나왔어요.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제 도시는 영원히 잊힐 거였거든요. 저를 바위에 새긴 사람은 제 남편이었어요...” (p.109)
기록 속의 이무는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 중국에서 발견된 조선인 아이였고, 독일인 양부를 따라 독일에서 성장했고, 프롬 교수에게서 고고학을 사사받으며, 과거의 영예를 잃은 오스만 제국으로, 고대 도시 하남의 흔적을 향해 여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도시의 이름, 하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노마드 여인에게 선택되었고, 하남을 찾았으며 동시에 하남을 잃은 자가 되어 사막으로 향했다.
“... 누군가 이 기록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태어난 나일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도 모든 걸 나처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길을 나서 사막에 도착했다. 사막은 나를 맞아주는 것도 그렇다고 내치는 것도 아닌 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p.262)
시인을 잃고 나서야, 열심히 직조된 시인의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의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나서 백 년 전의 기록물을 읽었다. 마주니 형과 마리타는 이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소설 속에서 마리타는 ‘인간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선택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선택하는 운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 선택되어진 운명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내게는 어떤 운명에 사로잡히기로 한 자의 과거 완료형이면서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로도 읽힌다.
허수경 / 박하 / 문학동네 / 277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