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과 정주는 우리의 운명이고, 고요는 도처에...
제임스 설터는 이제 없지만 그의 책은 남아 있었다. 지난해 1월에 책을 읽으려다 그만두었다. 번역된 문장들이 고르지 않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도 남은 책, 우리 언어로 번역되어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이상 없으니 침대 옆 탁자에서 다른 책들 아래로 아래로 숨어들던 작가의 책을 꺼내들었다. 여전히 책을 읽으며 어떤 난감함이 불쑥 튀어올라 난관이 되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칸트는 철학의 과제라 믿는 질문 넷을 제시했다. 어떻게 알 것인가. 어떤 희망을 품을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유럽이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얻는 데 도움을 준다. 유럽은 숙련된 문명의 고향이다. 수직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전통이 깊다는 말이다.” (p.36)
책은 여행에 대한 산문인데, 여행지나 여행 시기가 특정되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 발간된 것은 2005년이고 이미 작가의 나이 여든이었을 때이다. 책에 나온 여행의 기록은 짐작하건대 오래전의 것들로부터 길어 올려졌다고 여겨진다. 그저 성실하게 기억에 의존했을 수도 있고, 자신의 기록을 참고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궁금하게 여긴다. 어떻게 찾아오셨는지요? 스웨덴 여인 덕분이었는데 그녀가 전부는 아닙니다. 프랑스 이 지역은 샤쇠르 데 비페르(chasseur de vipères. 땅꾼)라는 남자를 고용해서 집에 사는 독뱀을 잡아 없앨 수 있다. 어떻게 찾았느냐 물으면 그는 냄새를 맡았노라고 답한다.
레크루트를 찾은 방식도 그렇다. 어딘가 존재했고, 우리는 코를 믿었다.“ (pp.87~88)
작가는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그리고 일본 등지를 여행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타고, 일본에서는 사이클링을 하고, 미국의 콜로라도에서는 암벽을 등반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그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곳에 일정한 시간만큼 둥지를 틀고 들어앉기도 한다. 잠깐 주저앉기로 작정하면 오랜 시간 고민하여 집을 고르고 특별할 것 없는 시간들을 차근차근 특별하게 만들어간다.
“아침이면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다는 고요하고 거울처럼 매끈하며 하늘은 완벽하게 푸르다. 꿈의 여성과, 혹은 혼자, 아니면 다른 가족 둘과 함께 깨어도 여전히 아름답다. 아무도 부르디조 들르지도 않는다. 10분 만에 읽은 <헤럴드트리뷴>이 벽난로 근처 땔감 가운데에 끼어 있다. 프랑스식인 높은 문 너머로 테라스가 어두워지고, 첫 빗방울이 유리에 나타난다. 쇼팽 레코드의 선율이 집 안을 떠다닌다. 고요함, 사치, 쾌락······.
... 외따로 떨어진 외국의 집에선 두려울 수 있는 밤이 걱정거리다. 텔레비전도 저녁 식사 손님도, 책 읽을 좋은 빛도 없는 밤. 이상하게도 이 지루한 밤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대신 8시 반이나 그보다 나중에 저녁을 먹고, 하늘은 여전히 밝고, 해송 꼭대기가 아래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서쪽 바위 언덕 꼭대기로 일몰을 알리는 강한 은빛이 올라앉는다...“ (p.113)
작가는 자신이 머무는 곳의 사회적 맥락을 눈 여겨 보기도 하지만 주로 자신의 시야에 의존하여 이곳저곳을 살핀다. 그러다가 문득 낯선 곳에서의 자신을 주관으로 주관하기도 한다. 작가의 여행기는 관계보다는 시선으로 채워지고 있다. 설령 관계를 맺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시선과 그 시선에 사로잡힌 것들 사이의 관계에 머무른다. 그 머무름으로 심화된다.
“그렇게 막은 내린다. 주말의 긴 교통 행렬이 떠나간다. 길가 풀밭에서 개가 자기를 버린 사람들을 찾아 걱정스레 종종거린다. 저녁 해변의 마지막 소풍, 바닷물에 담갔다가 재에 구운 옥수수, 버터 바른 쪽이 모래에 떨어진 마지막 빵 조각. 오래 된 집들은 빈 것 같다. 첫 낙엽이 길 따라 날린다. 그날 저녁 거위들이 고르지 않은 V 자를 그리며 목을 뻗고 찾아온다.
계절의 끝이 왔다. 고요하고 완벽한 나날, 아마도 최고의 시간. 바닷가에서 보내는 마지막 한 시간. 거의 텅 빈 모래사장에는 게의 집게발, 두 어린 소년과 엄마, 시가 밴드, 반라의 소녀, 아베.(안녕.)” (p.251)
작가의 여행들에는 독자를 주저앉게 만들려나 싶은 고요함들이 있다. 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만나기 힘든 고요가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서둘러 읽으려고 하면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글이 아니라 작가의 손끝과 발끝과 시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이동과 정주는 우리의 운명이고, 삶도 죽음도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이다. 이것들이 책 안에 있다.
제임스 설터 James Salter / 이용재 역 / 그때 그곳에서 (There and Then) / 마음산책 / 255쪽 / 2017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