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문신》

그의 여체를 향한 탐미의 여정이 시작되다...

by 우주에부는바람

다른 나라의 근대 작가들 소설은 읽으면서 우리 근대 작가들 소설을 읽지 않은지 오래 되어 찜찜하다. 그 찜찜함의 발로였는지 아내를 향해 우리 근대 작가들의 소설들이 현대의 문투에 맞추어 다시 씌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원본이 버젓이 있는데 그 원본을 어떻게 수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번역 소설들은 번역을 하는 시대에 맞추어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니, 일반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힘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게 되지 않겠느냐, 라고 나는 항변하였는데, 어쨌든...


「문신」

<문신>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10년에 <신사조>를 통해 발표한 소설이다. 아마도 발표된 것으로는 첫 번째 소설이라고 생각되고, 그의 여체를 향한 탐미주의적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대장정의 첫걸음인 셈인데, 그 첫 번째 걸음이 아주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문신사의 눈길을 끈 것은 곧바로 여인의 ‘새하얀 맨발’이었고, 작가의 풋 페티시즘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4년째 되던 어느 여름날 저녁, 후카가와에서 히라세라는 요리점 앞을 지나가다 문 앞에 멈추어 있떤 가마의 가리개 밖으로 드러난 새하얀 맨발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예리한 눈에는 사람의 얼굴처럼 복잡한 표정을 가진 발이 보였다. 그에게 그 여인의 발은 살로 만들어진 보옥이었다. 엄지부터 시작하여 새끼발가락에서 끝나는 섬세하고도 가지런한 발가락 5개, 에노시마 해변의 조가비보다 더 선명한 연분홍 발톱, 구슬인양 매끈한 뒤꿈치, 바위 틈의 청렬한 물이 쉴새 없이 적셔주는 듯한 촉촉한 살결. 이 발이야말로 뭇 남자의 생피로 살쪄가며 남자의 몸뚱이를 짓이길 발이었다. 이 발의 주인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여자 중의 여자일 것 같았다. 세이키치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얼굴을 보려고 가마 뒤를 따라갔지만 두어 마장 지나 놓치고 말았다.” (pp.12~13)


「비밀」

도시의 변두리, 숨어 지내기에 좋은 곳에서 기거하는 나는 밤이면 분을 바르고, 여자의 복장을 한 다음 길을 나선다. 밤의 이슥함 안에서 나는 한 여자를 만나고, 눈이 가려진 채 그 여자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 여자와 놀다가 다시 돌아온다. 나는 가려진 눈 안에서의 감각을 동원하여 그 여자의 집을 찾게 되지만, 이제 그 여자와의 환락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더 진하고, 피가 더 낭자한 환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동자」

열다섯 살과 열세 살의 두 동자인 천손동자와 구슬동자의 이야기가 우화처럼 전개되고 있다. 속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두 동자, 속세에 대한 위험의 경고 속에서 자란 두 동자 중 한 명이 속세에 나가게 되고, 한 명은 남게 된다.


「그리운 어머니」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과 아크등 아래의 몇몇 풍경이 겹친다. 다가가려는 아들과 다가옴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은 어머니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줄어든다. “문득 잠에서 깼다. 꿈속에서 정말 울었는지 베개에 눈물이 흥건하다. 내가 올해로 서른넷이다. 어머니는 재작년 여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또 눈물이 베개 위로 툭 떨어졌다.” (p.118)


「호칸」

호칸은 남자 기생을 의미한다. 호칸이 된 산페이의 여정 그리고 산페이의 어느 하룻밤의 이야기이다. 여성에게 당하는 남성이라는 소재 또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단골 소재이다.


「소년」

학교에서는 꼬리 감춘 개처럼 굴지만 자신의 집에서는 왕이 되는 소년, 그 소년의 집에서 기거하는 또다른 소년은 반대로 학교에서는 왕처럼 굴지만 집에 오면 다른 소년의 비굴한 하인 노릇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소년들과의 놀이에 섞이게 되지만, 결국 이 소년들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것은 소년의 누이인 마쓰코이다.


「슌킨 이야기」

“하루마쓰 겐교가 샤미센을 가르치던 곳이 우쓰보에 있으니 도쇼마치의 모즈야 집안의 점포와는 걸어서 약 15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슌킨이 연습하러 오고 갈 때 사환 하나가 매일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녔다. 사스케라는 이름의 그 소년이 바로 후일의 아쓰이 겐교로, 슌킨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스케가 처음 모즈야 집안에 들어와 고용살이를 시작하던 해에 슌킨이 아홉 살이고 본인은 열세 살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슌킨의 아름다운 눈이 영원히 빛을 잃은 뒤였다.” (p.214)

실려 있는 다른 소설들에 비하여 조금 길다. 중편 소설의 분량이다. 소설 속의 슌킨 그리고 사스케의 모습 그리고 평생의 행적이 눈에 선하다. 샤미센 연주로 연결되어 있는 사제지간이자 (절대 노출되지 않지만) 상열지사를 나눈 남녀간이자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해 있었던 주인과 하인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슌킨과 사스케가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짐작일 뿐이다. 슌킨과 사스케를 실컷 보여주고 있지만 절대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 감정들을 끊임없이 짐작해야 하는 것이 독자의 곤란함이자 재미이다.

“사람은 기억이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은 자를 꿈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상대를 꿈에서만 보았던 사스케는 사별한 때가 언제였는지조차 분명히 가늠하지 못했다. 덧붙이자면, 슌킨과 사스케 사이에는 앞에서 언급한 여자아이 외에 자식이 셋 더 있었다. 여자아이는 태어난 직후에 죽고, 남자아이는 둘 다 핏덩어리일 때에 가와라에 있는 농가로 보냈다. 아들 둘은 슌킨이 죽고 나서도 유품에 관심이 없었던지 거두려 하지 않았고 맹인인 친부 곁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사스케는 만년에 이르러 자식도 처첩도 없이 문하생들의 보살핌을 받다가 1908년 10월 14일 슌킨의 상월(祥月) 명일(命日)에 여든셋의 고령으로 죽었다. 그는 살아생전의 슌킨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슌킨의 형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21년 동안 고독하게 살았다.” (p.290)



다니자키 준이치로 / 경찬수 역 / 문신 (文身) / 어문학사 / 294쪽 / 201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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