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전복시키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정념 안으로 곧게...
《미친 노인의 일기》는 일흔일곱 살의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이 소설을 일흔여섯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하였다. 무언가를 소설의 소재로 삼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는 듯한 작가는 이 소설에서 며느리를 향한 한 노인의 에로틱한 정념을 그려내고 있다. 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월은 없고 일자만이 별다른 의미 없이 툭툭 적혀 있을 뿐이다.
“사쓰코가 먹다 남긴 은어의 잔해는 정말로 지저분하다. 매실 간장 장어 이상으로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다. 나에게는 이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p.18)
노인은 상당한 재력가이지만 일흔 중반을 넘겨 이제는 입주 간호사가 필요할만큼 쇠락한 상태이다. 아내가 있지만 한 방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고, 아들인 조키치와 며느리인 사쓰코 그리고 손자인 게이스케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딸이 가끔 들르기는 하지만 사이가 좋지 않고, 부인과도 데면데면하다. 그러한 노인이 오직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쓰코 뿐이고, 아들인 조키치와 사쓰코 또한 데면데면하다.
“여기에 같은 정도로 예쁘고, 같은 정도로 내 취향에 맞는 두 여성이 있다고 치자. A는 친절하고 정직하며 배려심이 있고, B는 불친절하고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데 능숙한 여자다. 그런 경우에 어느 쪽으로 끌리느냐 하면, 요즘의 나는 확실히 A보다는 B에 더 끌린다. 다만 아름다움에 있어 A보다 B가 조금이라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내게는 취향이 있기 때문에 얼굴이나 몸의 여러 가지 부분이 그에 합치해야만 한다. 나는 코가 지나치게 길고 높은 얼굴은 싫다. 무엇보다도 발이 희고 화사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아름다운 요소가 서로 비슷할 경우, 성질이 나쁜 여자에게 더 강하게 끌린다. 간혹 얼굴에 잔혹성이 드러나는 여자가 있는데 무엇보다 그런 여자가 좋다. 그런 얼굴을 한 여자를 보면 얼굴만이 아니라 성질도 잔혹할 것 같고, 또한 그러기를 희망한다...” (p.34)
사쓰코는 그저 순한 며느리는 아니다. 소설 속의 사쓰코는 노인의 정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이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쓰코는 노인의 방에 있는 화장실에서 몸을 씻고, 노인에게 허락을 받은 이후 남편이 없는 사이에 남자를 집에 들이고, 다른 식구들이 놀랄만한 장신구를 얻어내기도 한다. 노인 또한 사쓰코의 이런 악녀적인 면을 모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면에 자신이 끌리고 있음을 일기에서 고백한다.
“... 나도 사쓰코와 마찬가지로 위악하는 경향이 있어서 남자가 우는 것은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의외로 눈물이 많아서 별것도 아닌 일에 금방 눈물이 난다. 그것을 또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늘 아내에게 모진 말을 하며 폭군처럼 굴었는데 아내가 울면 영 주책없이 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매우 애써 왔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좋은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눈물이 많고 저에 약하면서도 본심은 배배 꼬여서 매정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p.134)
하지만 노인의 에로틱한 정념이 아무리 깊어도 그는 노인일 뿐이다. 그에게는 이제 성적 욕구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해소할만한 여력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기껏해야 사쓰코의 몸에 자신의 혀끝을 갖다 대는 것이 고작일 뿐이고, 그마저도 지나치면 자신의 삶에 치명적인 위해를 주게 될 수도 있는 상태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써서 그녀의 발을 탁본하기로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발 페티시즘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생전의 나는 그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사후에 다소라도 앙갚음을 해 줄 생각이 있다면 이런 방법 외에는 없다. 죽고 나면 그런 생각을 할 의지가 없어지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육체가 없어지면 의지도 없어지는 것이 도리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닐 터다. 예를 들어 그녀의 의지 안에 내 의지의 일부도 옮아가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녀가 돌을 짓밟으며 ‘나는 지금 노망난 그 늙은이의 뼈를 이 땅속에서 짓밟고 있다.’라고 느낄 때, 내 혼도 어디에선가 살아서 그녀의 무게를 느낌 고통스러워하고, 곱고 만질만질한 발바닥의 부드러움을 느끼리라. 죽어서라도 나는 느껴볼 것이다.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쓰코도 땅속에서 기꺼이 그녀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내 혼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p.178)
그는 묘비석에 사쓰코의 발을 새겨 넣고 자신의 무덤에 놓아둘 작정이다. 노인은 자신의 묏자리를 알아보러 간 김에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한다. 그러는 사이 사쓰코는 자신을 향한 노인의 집념에 슬슬 지쳐 간다. 노인의 육체와 정신도 쇠락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이 노인은 사쓰코와 함께,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정념과 함께 하는 중이다.
“... 교수의 의견은 노인의 병은 이상 성욕이라는 것으로, 현재 상태로는 정신병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 환자에게는 늘 정욕이 필요하며 그것이 이 노인의 목숨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 드려야 한다...” (p.187)
작가에게는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준거 따위가 안중에 없었을 것이지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위와 같은 문장을 보며 독자인 나는 조금 안도한다. 사멸하는 것 안에서 마지막까지 바깥을 향해 발화하는 것으로서의 정념을 보여주기 위한 극한의 관계 설정으로 노인과 사쓰코를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그렇다. 어쨌든 나이든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나이든 작가만이 거론할 수 있는, 나이듦의 수치를 전복시키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정념 안으로 곧게 뻗어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 김효순 역 / 미친 노인의 일기 / 민음사 / 206쪽 / 2018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