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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9. 2024

임형남 노은주 《골목 인문학》

골목 없는 여기에서 더 많은 것을 잃어가는 중인 우리를 향하여...

 

   “우리는 편리를 위해서 스스로 불편하게 삽니다. 아니 그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고 대단한 지식을 얻는 것도 아니어도, 골목을 걷는 것, 골목을 생각하는 것은 저 멀리 떨어져버린 우리의 원초적인 무언가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pp.8~9)


  책 머리에 실려 있는 ‘우리는 편리를 위해서 스스로 불편하게 삽니다.’라는 표현에 확 꽂혔다. 예전의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엑셀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손으로 적고 계산기를 두들겨서 해결하던 많은 일들을 대체했다. 많은 이들은 그걸 굉장한 편리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도 처음에는 그랬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 의아했다. 연필과 종이와 계산기 하나면 충분하던 일이, 컴퓨터도 있어야 하고 별도의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고 각종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공부해야 가능한 일이 되었는데, 그게 정말 편리해진 건가? 게다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일을 해결한다고 해서 남는 시간에 논 것도 아니다. 남겨진 시간에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했을 뿐인데...


  “갤러리가 들어오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들어오며 이윽고 카메라를 둘러멘 사람들이 오면, 동네는 유명해지고 소문 듣고 땅을 사는 사람들이 나타나며 땅값이 오른다. 높아지는 임대료에 원래 살던 주민들은 점차 떠나고 그 동네를 일구었던 갤러리들도 임대료를 감당 못하고 떠나고, 결국 동네에는 ‘평당 얼마’라는 등급만 남게 된다.” (p.47)


  책은 그런 나의 옛 생각과 어느 정도 핀트가 맞닿아 있다고 여기게 되는 두 저자가 우리나라와 일본과 중국과 터키의 골목을 몸소 돌아다닌 후에 적은 기록이다. 서울을 거처로 삼아 살아온 세월이 삼십오 년을 넘다보니, 책에 실린 서울의 골목들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골목들은 그러지 못했다. 서교동 홍대 골목이랄지 압구정 로데오 거리 같은 곳은 눈에 훤하였지만 교토 니시진 골목이나 체코 프라하 황금소로 골목 같은 그저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 우리나라는 넒기도 하고 깊기도 하다. 그것은 평면적인 넓이와는 관계없다. 우리의 땅은 주름이 많고 깊어서, 우리는 평생을 아무리 빠른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녀도 다 볼 수 없다.” (p.91)


  물론 어린 시절의 여러 골목들, 그러니까 동네 천변으로 흘러드는 하수구에 쪼그리고 앉아 개구리를 잡아대던 대전시 갈마동의 골목이랄지, 시험 점수에 절망한 초등생이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가출을 감행하여 소용돌이 모양으로 돌고 돌았던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의 골목이랄지, 엄마가 팔아버린 진돗개 순돌이를 찾아 울어 퉁퉁 부은 눈의 세 남매가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순돌이와 비슷한 개가 있는지 헤매고 다녔던 용인의 어느 골목을 떠올린 것은 또 다른 덤이었다.


  “그렇게 골목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 또한 이제 서울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일상의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밀려나고 생활과 멀어진 도시의 골목들이 늘어나면서 이제 서울은 정체성이나 역사성이 모두 증발되어버린 채, 말린 안개꽃처럼 화병에 늙지도 않고 썩지도 않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하는 너무나 상투적인 고민을 다시 하게 된다.” (p.142)


  온전한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한 채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었거나 곧 개발이 시작될 정도의 공간에서 주로 자랐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태어나 직업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옮겨 다니며 고만고만한 골목에서 자랐다. 드넓은 논밭이 아니라 골목이야말로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골목들은 이제 모두 사라졌거나 급하게 사라져가는 중이다. 책의 이곳저곳에 그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인간이 살면서 누리는 큰 즐거음 중 하나는 좋은 길을 걷는 것일 것이다. 특히 포실한 흙길을 목적 없이 천천히 걸을 때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땅과 직접 교감을 할 수 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무장한 도시의 길들은 관리가 편하고 자동차가 속도를 내기는 좋지만, 그 땅으로는 빗물이 스며들 수 없고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결국 그런 환경 속에서 인간은 오랜 시간 탁자 위에 놓아둔 식빵처럼 바싹 마르게 된다.” (p.185)


  사라진 골목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할 테고 그렇게 도시의 우리들은 고향을 잃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잘 사는 일과 정량 측정된 부를 고스란히 등치시키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이 더 흘러 어느 때인가에, 그저 이런 책을 통해서만 골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굽이굽이 골목을 헤매던 우리는 이제 골목 없는 여기에서 더욱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임형남 노은주 / 골목 인문학 : 그 골목이 품고 있는 삶의 온도 / 인물과사상사 / 368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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