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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9. 2024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자신이 두고 떠나는 타인들을 위하여 남겨 놓고 싶은 한 문장...

 

   “그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가 읽고 생각하고 확신하고 말했던 그것들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시간 앞에 지금 나는 서 있다는 그런 생각.” (p.41)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음을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게 될까, 누구와 그 시간을 공유하게 될까, 누구에게 그 시간을 공유하자 요구하게 될까,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뎌낼까, 어떻게 그 순간들은 인식될까... 죽음의 방식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일까, 누차에 걸친 누적의 결과물로 다가올까...


  “공간들 사이에 문지방이 있듯 시간들 사이에도 무소속의 시간, 시간의 분류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잉여의 시간이 있다. 어제와 내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쓰임도 없는 시간, 오로지 자체만을 위해서 남겨진 공백의 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그토록 오래 찾아 헤매던 생을 이 공백의 시간 안에서 발견하고 놀란다. 다가오는 입원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판결을 기다리는 환자처럼.” (pp.55~56)


  오래 전 나는 자연사를 낮은 수준의 죽음으로 치부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마음인지를 안다. 나이가 들며 도처에 있는 즐비한 죽음, 가시권에 들어선 죽음, 정량화 되어 버리는 죽음, 측정되지 않는 죽음, 소비되거나 도구화되는 죽음을 보게 되고, 그것들이 누적되고 나면 쉬이 죽음을 거론하는 일조차 힘겨워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책 속에 있는 죽음마저도 그렇다.  


  “나는 이제껏 지나치게 감정주의자였다. 그래서 대부분 감정이 원하고 시키는 대로 행동해왔다. 그러나 행동은 감정의 시녀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감정이 필요할 때 행동이 감정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균형이 잡히고 길이 보인다.” (p.98)


  책은 철학자 김진영의 2017년 7월에서 2018년 8월까지의 기록이다. 2017년 6월 30일 간암 진단을 받은 이후 2018년 8월 20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적은 것들로, 234편의 길지 않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길어야 한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고, 짧은 것은 그저 두 개의 단어로 멈춰 있기도 하다. 굉장한 미문인 것도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아포리즘이라고 하기엔 일상적이고 느슨하다.


  “군포 병원으로 면역 항암제를 맞으러 가는 길. 꽉 막힌 고속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강렬한 그리움, 아니 그리움이 아니다. 살아서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욕망의 충동.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아니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그렇게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p.233)


  하지만 이 투병 중의 일기는 솔직하고 투명하다. 그는 좀더 거칠고 난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병의 굴곡과 예상외로 빠른 진척이 그를 채근하였을 것인데 그런 조바심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타자를 위한 것’으로서의 글쓰기를 했지만 타자를 의식한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을 보다 확실히 의식하기 위하여 타자를 내몰지 않았고, 죽음을 앞 둔 하나의 공간에 함께 두려하였다.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건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병중의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들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나도 남겨질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p.242)


  그는 영면에 들기 며칠 전인 마지막 순간 자신의 딸을 불러 휴대전화를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메모장을 열어 이렇게 적었다. “화해. 다투지 않기. 건너가기, 넘어가기, 부드럽게 여유 있게. 내 마음은 편안하다. 가고 오고 또 가고. 잘 보살피기. 적요한 상태.” 이 중 한 문장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우리가, 자신이 두고 떠나는 타인들을 위하여 남겨 놓고 싶은, 가장 확실한 문장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p.279)



김진영 / 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 한겨레출판 / 282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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