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소년 시절》

일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의 영역에서 엄정한 문장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2018년 9월 1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는 삼년 전 블로그에 메뉴 하나를 추가했다. 메뉴명은 ‘메모아르’인데, 메모아르는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쓰는 것으로,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서전’과는 다르다고 고어 비달은 말했다. 그리고 박상미는 《나의 사적인 도시》에서 고이 비달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억은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시간을 거쳐 구성된 세계’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쓰고 싶었다.


“... 그는 아버지의 정상성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가끔 험악한 눈을 하고 화를 내며 때리겠다고 위협할 때 어머니가 막아주는 경우가 그렇다. 동시에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비정상적인 어떤 것, 계속 살아 있기 위해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떤 존재로 만든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p.17)


역자 후기에 따르면 존 쿳시는 ‘모든 글은 자서전이고, 모든 자서전은 스토리텔링’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러니까 존 쿳시는 자서전과 소설의 구분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소년 시절》은 분명 존 쿳시의 소년 시절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자서전에는 스토리텔링이 빠지지 않으니 또한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녀는 경우에 따라 하는 말이 매우 다르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와 동생은 그녀의 모순을 지적하며 그녀와 입씨름을 한다. 변호사보다 농부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왜 변호사와 결혼했느냐? 책에서 배운 지식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선생이 되었느냐? 그들이 입씨름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 웃는다. 자기 아이들의 말재주에 너무 즐거워서, 자신을 방어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주장을 굽히며 그들이 이기게 둔다.” (p.54)


소설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1940년대 말, 그리고 1950년대 초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존 쿳시는 아프리카너스, 우리가 보어인이라고 부르는 초기 이주자들인 네델란드인, 독일인, 프랑스인을 조상으로 두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네델란드 이민자의 후손, 어머니는 폴란드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존 쿳시는 자신이 속한 아프리카너스라는 계층에 대한 반발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가 그보다 자기 집안 편을 든다는 걸 안다. 이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복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그는 아버지가 집안을 통솔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고 끔찍해한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둔하고 어리석은 삶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와 그가 참을 수 없는 존재 사이에 서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느림과 아둔함에 짜증을 내면서도, 자신의 유일한 보호자인 그녀에게 매달린다. 그는 그녀의 아들이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싫어한다...” (p.127)


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을 닮아 있기도 하다. 존 쿳시는 소설 전반에 걸쳐 아버지를 없는 존재로 치부한다.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집착의 경향을 보인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하며, 심지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기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어머니야말로 자신의 ‘가장 무력하고 가장 친밀했던 처음 몇 년의 삶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둘이다. 두 번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 번은 여자한테서, 또 한 번은 농장한테서. 어머니는 둘이지만 아버지는 없다.” (p.154)


나는 존 쿳시의 글이 사실보다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은 스토리텔링이기도 하므로, 기억에 의존하였다고 하여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나는 어서 나의 ‘메모아르’에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고 느슨하게 다짐하며 이 자전적 소설을 읽었다. 존 쿳시는 엄정한 문장들만으로 글을 쓰고 있고, 그래서 주인공은 일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의 영역에 서 있다.



존 쿳시 J.M. Coetzee / 왕은철 역 / 소년 시절 (Boyhood : Scenes from Provincial Life Ⅰ) / 문학동네 / 279쪽 / 2018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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