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하지만 어둡고 확장 가능하지만 일단 멈추고 있는 듯한 이야기들...
「사라진 꿀벌」
“K는 내가 그때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표정이 없는 청년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악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예컨대, 대부분의 동물은 표정이 없지 않은가.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다람쥐나 참새는 내게 절대로 미소를 짓지 않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지는 않는다. K는 내게 그런 존재였고, 다람쥐나 참새와 다를 바 없이 조용한 그의 생활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면 내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p.11) 작은 마을의 피부가 희고 고운 우편배달부인 K는 누군가에게 보내지는 엽서를 스틸하여 서체를 그대로 흉내 내어, 그는 어떤 글씨체이든 그대로 복사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다시 적은 필사본을 상대방에게 보냈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러니까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원본 엽서의 높이가 8미터가 되도록...
「하와이로 찾으러 온 남자」
“잠깐 실례합니다. 이상한 질문이지만, 전에 저를 만난 적이 없나요?” (p.41) 변형된 도플갱어 이야기 같은, 그것도 아주 짧게...
「투명한 미궁」
여행 중에 만난 여인, 그리고 그 여인과 억지로 치러야 했던 공개 정사,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 쌍둥이 자매... ‘투명’과 ‘미궁’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처럼, 이야기는 상투적이지 않은데도 겉돌고, 이 문장만 뇌리에 남아 떠돌고... “나이프는 고기를 자를 때처럼 당신의 얼굴도 일부만 잘라내 보여주죠.” (p.62)
「family affair」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발견하게 된 총 한 자루, 예순 두 살의 도시에와 마흔여섯의 조카인 아오이는 그 총 한 자루를 가운데 둔 채로 당황하고, 긴장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을 떠난 오빠 그리고 아버지를 떠올리고, 사라진 아오이의 남자를 떠올린다.
「불빛 호박琥珀」
“나는 내 안의 모든 욕망을 오로지 불에 대한 사랑 하나로 순화함으로써 인생을 단순화하고 투철하게 바꾸어왔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성취되지 않는 짝사랑이며, 그렇기에 그 정열로 내 생을 끊임없이 채워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껏 인생에서 한 번도 허무함을 느낀 적 없는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입니다.” (p.168) 여성으로부터 아무런 감정적 그리고 육체적 동요를 이끌어내지 못한 남자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인 남성에게서 뭔가를 습득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그는 불을, 불만을 사랑한다.
「Re: 요다 씨의 의뢰」
소설가 오노에게 의뢰된 연극 연출가 요다 씨의 이야기... “시간은 언제나 아직이거나, 딱이거나, 벌써거나, 셋 중 하나다. 시간을 과하게 의식하거나, 적절하게 의식하거나, 전혀 의식하지 않거나. 의식이 산만할 때는 느리고, 뭔가에 몰두할 때는 빠르다. - 내적인 시간 감각의 혼란을 나는 한동안 이렇듯 단순한 이치로 정리하려 했다.” (p.231) 어느 날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공항에서 느끼기 시작한 시간의 차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느끼는 시간과 자신이 느끼는 시간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느껴버리게 된 요다 씨가 겪게 된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을 나는 소설로 만들기로 작정한다. “개개인의 인간은 저 나름의 템포로 살아간다. 그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템포는 늘 흔들린다. 그것 또한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시계를 공유하며, 이따금 시각으로 동기同期해야 한다. 세계 지속의 동일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그럭저럭 유지된다는 것은, 그 시간 감각의 개체차가 결국 그리 크지 않다는 소극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 경우는 그 차이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p.240)
히라노 게이치로 / 이영미 역 / 투명한 미궁 / 문학동네 / 263쪽 / 2017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