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품는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수치가 중요한...
일본이 패망하고 십여 년 정도가 흐른 시기, 나는 도쿄의 변두리라고 보여지는 니시마쯔바라 주택지로 이사를 하였다. 나에게는 지병이 있어 기흉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곳에는 쓸만한 병원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다. 그러던 차에 스구로 의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의사인 스구로에게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풍기는 뉘앙스는 이상하였지만 스구로는 의외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나는 의사인 스구로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 어디 작은 마을에 자그마한 의원을 차리고 환자들을 왕진한다. 마을 유지의 딸과 결혼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그렇게만 되면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봐드릴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스구로는 생각한다.” (p.48)
그리고 나는 스구로가 과거 의과 대학생이던 시절, 살아 있는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하는 생체 실험에 참가한 전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드른 F시에서 스구로의 재판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제 나에게서 스구로에게로 넘어간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그때, 의학생 신분인 그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 소설의 중심으로 들어선다.
“자신이 어째서 아주머니에게만 그토록 오랫동안 집착했을까 하고 스구로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토다가 말한 대로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나마 살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나의 첫 환자, 그녀가 나무상자에 담겨 빗속에서 옮겨지고 있다. 스구로는 이제 오늘부터 전쟁도 일본도 자신도 모두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다.” (p.79)
그때, 연일 거듭되는 공습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연명을 하는 일조차 힘겨운 그곳에서 병에 걸린 이들이 또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그곳에서 스구로는 힘겹게 살아내는 중이다. 동기인 토다가 나름의 현실 감각으로 그 어두운 시대에 부합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스구로는 점차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간다. 스구로는 그러한 심정 속에서 생체 해부 실험 참가를 결정한 것이다.
“...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양심이 마비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양심의 가책이란 지금까지 쓴 대로 타인의 눈이나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일 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라도 한꺼풀만 벗기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받거나 사회의 비난을 받은 일은 없었다.” (p.130)
하지만 스구로는 결국 그 실험장에서 한 켠으로 물러서고 만다. 포로를 속이고 그를 마취시키고 살아있는 생명이 속수무책으로 시들어가도록 만드는 행위를, 의사인 그들이 군인인 참관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진행시켜 가는 동안 스구로는 차마 온전히 동참하지 못한 채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그 한 켠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 작품은 1945년 5월 17일부터 6월 2일에 걸쳐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실제로 행해진 ‘큐우슈우 대학 생체해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5월, 후꾸오까 시를 시작으로 큐우슈우 전역을 폭격하던 미군의 B29기가 추락하여 탑승원 12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서부 사령부는 이중 8명에게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내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큐우슈우 대학 의학부 측에서 이 8명을 생체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을 군에 요청했고, 군이 이를 받아들여 발생한 사건이다.” (p.186, 작품해설 중)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하여 소설은 씌어졌다. 일본인이 가져야 할 죄의식, 그러나 그저 벗어나고자 하기만 하는 죄에 대하여 일단의 소명 의식을 작가가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스스로에게 품는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수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소설 속 인물인 토다, 에게 투영되는 보편적인 일본인의 성정이 도드라진다. 그 대척점에 스구로, 가 서 있었다, 구석의 한 켠에...
엔도오 슈우사꾸 / 박유미 역 / 바다와 독약 (海と毒藥) / 창비 / 203쪽 / 2014, 2018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