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나 공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을 향하여 곧바로 직진...
“옛날에 런던의 외딴 교외에 에스라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살았다. 에포스는 원기 왕성한 사람으로, 스스로 관심 있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한 지금 같은 생활을 유지하리라 마음먹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영화와 연극을 정기적으로 관람했고 긴 시간 동안 책을 읽었으며,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자기보다 마흔 살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한 차례 아테네를 여행했는데, 그때마다 왜 그리스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러나 이제 변화를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녀는 어찌 되었든 런던의 삶을 즐겼다.
에포스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경험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아이를 한 명 낳기도 했다. 합법적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신혼에나 맛볼 법한 행복과 불행을 한 두 해 동안 모두 경험했다. 그녀의 아기가 지독한 폐렴으로 죽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밤에 아기의 아버지가 가방에 짐을 꾸렸다. 그는 에포스에게 더없이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에포스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모두 경험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 설계한, 활기 넘치지만 피상적인 일상에 안주했다. 에포스는 자신의 생활에 매우 만족했으며 더트 부부가 그녀의 삶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pp.87~88, <탄생을 지켜보다 (In at the Birth)> 중)
조금 길게 인용하였다. 단편선에 실린 <탄생을 지켜보다>의 첫 세 문단이다. <탄생을 지켜보다>는 책에 실린 스물 세 개의 단편들 중 가장 좋아하게 된 소설이다. 물론 책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훌륭하다. <토리지 (Torridge)>, <육체적 비밀 (Bodily Secrets)>, <산피에트로의 안개 나무 (The Smoke Trees of San Pietro)> 등도 좋았다. <토리지>의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 일부까지를 살펴보면, 윌리엄 트레버 소설 작법의 작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어른이 된 토리지의 모습이 어떠할지 혹은 윌트셔와 메이스해밀턴 그리고 에로스미스가 어떤 어른이 될지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열세 살의 토리지는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소리에 걸맞은 푸딩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리지의 작은 눈과 짧은 머리카락은 생쥐를 떠오르게 했다. 회색 교복 셔츠의 옷깃 아래로 둘러맨 기숙사 넥타이는 적당한 형태와 크기의 적갈색 삼각형을 이루면서 정성스럽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토리지의 검정 구두는 언제나 윤이 났다.
토리지는 독특한 면이 있는 아이였다. 토리지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지만 보는 사람이 짜증 날 정도로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토리지는 운동을 잘하지 못했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토리지는 반쯤 웃고 있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한쪽으로 비딱하게 기울인 채 교실에 앉아 있었다. 토리지는 가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토리지는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낸 것에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면서 전혀 당황하거나 창피한 기색 없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토리지는 가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순진했다. 그러나 토리지는 정말로 순진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모두가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pp.376~377, <토리지 (Torridge)> 중)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소설의 시작 부분에는 곧바로 누군가가 등장한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니라 인물이 먼저 튀어 나온다. 그리고 곧이어 설명하거나 묘사한다. (등장인물의 그때까지의 사적 역사를 훑어야 할 때는 설명을, 등장인물의 과거의 어느 한 시기로 곧바로 진입해야 할 때는 묘사를 한다.) 많은 소설이 택하는 시작 부분의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배경 묘사 같은 것은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에는 없거나 거의 없거나, 한다.
작가는 소설의 서두에 매우 정직하게 소설의 주요 인물들, 그 혹은 그녀 혹은 그들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들을 알아가기 시작해야 한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시작점에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소설의 마지막 지점에 가서야 그 시작점에 내포되어 있던 것을, 그제야 보다 정확하게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단편소설 창작의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도통 이뤄내기 힘든 고지를 작가는 너무 쉽게 선점하는 것만 같다.
『“나는 사람들한테 이해심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늙어 가면서 점점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답니다. 인간이란 본래 이해심을 타고나지 못한 것 같아요. 가장 가치 있는 일들을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죠. 그리고 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해요.”
“정말 옳은 말씀이에요! 제가 베릴한테 가끔 하는 말이 바로 그거예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다니 기분이 좋은 걸요. 이 사실을 베릴한테 전해야겠어요.”
“제 경우에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랍니다.”
“생각과 본능 사이의 경계는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뚜렷하지 않아요.”』 (p.105 ~106, <탄생을 지켜보다 (In at the Birth)> 중>
<탄생을 지켜보다>에 등장하는 에포스와 더트 씨 사이의 대화 부분에 어쩌면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의 보다 깊숙한 비의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사실 어떤 분명한 이해를 독자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여 이해하기 보다는 본능적으로 느끼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물론 생각과 본능이, 이해와 느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안다. 그는 그렇게 쓴다.
윌리엄 트레버를 두고 ‘현대 단편소설의 계보를 잇는 이야기의 대가’ 그리고 ‘인간 생활의 가장 기민한 관찰자’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살피기에 충분한 단편선이다. 줌파 라히리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장편 소설도 잘 쓰지만 단편 소설에서도 특기를 발휘했던 작가들이 윌리엄 트레버에게 반한 것도 특이하다. 윌리엄 트레버 또한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가리지 않고 썼다. 그리고 스스로를 ‘어쩌다 장편소설을 쓰는 단편 작가’라고 규정했다.
윌리엄 트레버 William Trevor / 이선혜 역 /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 현대문학 / 614쪽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