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한 기록이자, 기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네 살이다. 전쟁이 막 시작됐다.“ (p.9)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만큼 좋아한다. 나도 아고타 크리스토프 만큼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보다 늦게 글을 읽기 시작했겠지만 많이 늦지는 않았다. 일일학습지로 글자를 배웠고, 글자를 배우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것으로 좋았다.
“여전히 지금도, 매일 아침, 집이 비고, 모든 이웃들이 일하러 나가면 나는 다른 것을, 그러니까 청소를 하거나 어제 저녁 식사의 설거지를 하거나,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고 세탁물을 다리거나, 잼이나 케이크를 만드는 대신 식탁에 앉아 몇 시간동안 신문을 읽는 것에 가책을 조금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쓰는 대신에.“ (p.14)
쓰는 것에는 그만큼 열중하지 못했다. 쓰지 못한다고 하여 가책의 심정을 갖거나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처럼 보고 듣고 읽고 난 다음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쓰기 전에 그렸을 수도 있다. 샛방 이웃이었던 무당 할머니는 내가 벽에 그린 그림을 보면서 신기가 있다고 하였다. 엄마는 얼마 되지 않아 방을 빼 이사를 준비했다. 그런 말을 듣고 그 할머니와 이웃으로 계속 지낼 수는 없었다고 하였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어제, 모든 것은 더 아름다웠다. / 나무들 사이의 음악 / 내 머리카락 사이의 바람 / 그리고 네가 내민 손안의 / 태양.” (p.34)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독일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러시아가 제 나라를 유린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제 나라에서는 계속 살 수가 없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갓난쟁이인 딸이 있었고, 스위스에 도착한 다음에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합본 출간된 책의 첫 번째 권에 해당되는 소설이 탄생했다.
“스위스에 도착하고 5년 후, 나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지만 읽지는 못한다. 나는 다시 문맹이 되었다. 네 살부터 읽을 줄 알았던 내가 말이다.
나는 단어들을 안다. 읽을 때는 그 단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글자들은 아무것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헝가리어는 소리 나는 그대로 글을 쓰지만, 프랑스어는 그렇지 않다.“ (p.109)
그때까지 그녀는 새로운 문맹의 상태, 그러니까 글을 배우거나 읽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어로 말하고 읽고 심지어 글을 썼다. 하지만 헝가리를 떠난 후 그녀는 까막눈이가 되었다. 시간이 흘렀고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자책했을 것이고, 어느 순간 스스로 적의 언어라고 말하는, 모국어를 죽이기 때문에 적의 언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또 그녀를 자책의 시간 속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시를 쓰는 데는 공장이 아주 좋다. 작업이 단조롭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율에 맞춰 규칙적인 리듬으로 반복된다. 내 서랍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다. 시가 형태를 갖추면, 나는 쓴다. 저녁마다 나는 이것들을 노트에 깨끗이 정리한다.” (p.88)
자전적 이야기인 《문맹》에는 이런 모든 여정이 아주 짧게 수록되어 있다. 모국어와 함께 자신이 써놓은 글도 헝가리에 두고 작가는 떠나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것은 장소와 시간과 상황에 구애받지 않았다. 《문맹》의 기록은 기록을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한 기록이자, 기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책은 짧지만, 뒤돌아보는 자의 명료함으로 가득하다.
“베를린에서 어느 저녁, 우리는 낭독회를 갖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러, 내 이야기를 들으러, 나에게 질문하러 올 것이다. 나의 책, 나의 삶, 나의 작가로서의 여정에 대해.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p.103)
아고타 크리스토프 Agota Kristof / 백수린 역 / 문맹 (L'Analphabète): 자전적 이야기 / 한겨레출판 / 127쪽 / 2018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