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어느 사이 태동하게 되는 또 하나의 가족...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감독의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찾았다. 쌓여 있는 책 더미 아래에서 간신히 발견했다. 내게는 비슷한 운명을 가지고 있는 책이 한 권 더 있는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쓴 산문집인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이다. 나는 책을 사고, 이어서 감독의 <동경 이야기>를 다운로드 받았는데,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책도 읽지 않고 있다.
감독의 책에 (이번 영화 <어느 가족>에서 할머니 하쓰에를 연기하고 있는) 키키 키린과 관련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에 제가 출연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부탁을 전부 수락하니 좋을 대로 쓰세요” 매니저를 두고 있지 않은 키키 키린의 집에 전화를 걸면 나오는 음성 사서함 멘트라고 한다. 왠지 키키 키린 답다. 안으로 돌돌 말린 할머니 같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품이 넓다.
“감독님. 잘 알겠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니까 어른 배우를 클로즈업하거나 돋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이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캐스팅 된 키키 키린이 감독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키키 키린은 이외에도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함께 했다. 모든 작품에서의 키키 키린이 좋았다.
좀도둑질을 하는 아들 쇼타 역의 죠 카이리를 보면서는 <아무도 모른다>의 야기라 유야를 떠올렸다.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소년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죠 카이리의 연기도 인상 깊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아내에게 <아무도 모른다>의 소년과 헷갈린다, 라고 하였다가 지청구를 먹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2004년 영화이고, 야기라 유야는 성인 영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아버지 역할을 그러니까 아버지이기를 원하는 아버지 역할을 하는 이는 릴리 프랭키이다. 릴리 프랭키는 삽화가이자 디자이너이며 작사 작곡을 하는 음악가이고 방송 작가에 라디오 DJ와 사진가를 두루 거치고 병행하는 배우이다. 게다가 소설가이기도 한데 그의 소설 《도쿄 타워》를 같은 제목인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 타워》보다 서너 배쯤 더 좋은 소설이라고 했다가, 어떤 이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가족을 연기한 이들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노부요를 연기하고 있는 안도 사쿠라였다. 우연히 발견되어 자신의 가족으로 들어오게 된 어린 유리 혹은 쥬리를 학대하는 엄마에게 돌려주는 대신 함께 하기로 작정하는, 이 가족의 해체를 피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불가피한 가족의 해체 후에도 모든 죄를 떠안고 감옥에 들어가는 여인을 제대로 연기하고 있다.
영화의 원제는 ‘만비키가족’인데, 만비키는 도둑질 그것도 영화에서처럼 마트나 문구점 같은 곳에서의 좀도둑질이나 좀도둑을 의미한다. 그것을 ‘어떤 가족’으로 바꿔 개봉하려다가 최종적으로는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게 되었다. ‘어느’와 ‘어떤’에는 ‘관련되는 대상이 특별히 제한되지 아니할 때 혹은 제한되지 않음을 이를 때 쓰는 말’이라는 공통의 의미가 있다. 이 독특한 가족을 독특하지 않은 가족으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그저 ‘어떤’ 혹은 ‘어느’ 가족으로 보이도록 하려는 의지가 깃든 제목일 수도 있겠다.
꼭 닯은 두 사회, 전쟁을 겪은 극단적인 극우 세력이 있고, 물질에 대한 욕망을 당연시하고, 그로 인해 격해지는 빈부격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조장하고, 젊은 낙오자들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고, 나이든 이들은 가난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는 실질적으로는 해체되었고, 하지만 이념적으로는 남아서 이율배반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이율배반을 이용하여 사회적 안전장치 마련을 차일피일 미루도록 만들고, 그러는 동안 ‘어느 가족’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게 도통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영화라면 일본보다는 대한민국에서 먼저 만들어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늦은 조바심이 생긴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영화는 <세번 째 살인> 보다는 확실히 내 취향에 더 맞았지만,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나 <바닷마을 다이어리>보다는 덜 감응하였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와 같은 선상에 위치시키면 적당해 보인다.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키키 키린, 죠 카이리, 마츠오카 마유, 사사키 미유 출연 / 121분 / 2018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