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렌 아데 감독 <토니 에드만>

세밀하고 자잘한 갈등이 털복숭이 탈을 사이에 두고서만 봉합될 때...

by 우주에부는바람

*2018년 7월 2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여섯 해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은 주로 나와 동생이, 몸을 써야 하는 일은 주로 아버지가 하는 식이다. 함께 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내가 일하는 공간의 바닥을 청소해주고는 하였는데, 어느 날 보니 바닥을 닦은 대걸레를 들고 어딘가로 나갔다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딸린 화장실은 그냥 지나쳐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걸레를 들고 나가실 때 혹시나 하면서 뒤를 따랐더니 사무실 옆의 홍제천으로 내려갔다 올라오셨다. 나는 잠자코 돌아와 사무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 거기에서 걸레를 빨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흐르는 물에 걸레를 빠는 일이, 그러니까 수도요금도 아끼게 되고 일도 수월한 작업이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인지 헷갈려하시는 듯하였다. 나는 공공재인 홍제천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일의 위법성 따위를 이야기하려다 그만 두었다. 내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고, 그 후로 다시는 그리 하지 않으셨다.


나는 칠십 중반에 접어든 아버지가 많은 부분 헷갈려 하시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지난 겨울 수차례 촛불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지만 크게 말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 그만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였다. 너는 알 수 없지만 자신만이 아는 루트를 통해 (아버지는 오랜 세월 군인이었고, 자유총연맹이니 군인공제회 등에 아직 친구분들이 있다) 들은 바, 너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그럴 수는 없어요, 위험하다면 더 나가서 그런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깃들어 있는 불안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 <토니 에드만>을 보는 동안 아버지가 떠올랐다. 영화 속의 아버지인 빈 프리트와 딸 이네스를 보면서 영화 밖의 아버지와 나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빈 프리트는 영화 속에서 토니 에드만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서, 그것으로도 모자라 불가리아 털북숭이 탈 쿠케리를 쓰고서, 딸과의 접촉을 원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른 체 할 수 없고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난감함이 영화 속 아버지에게 가득하다.


영화 속 아버지가 68세대의 리버럴한 노동 가치관을 지닌 대략 블루 칼라에 속한 인물이라면 그 딸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M&A 업체에서 기회를 노리는 화이트 칼라에 속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농경 사회에서 태어나 천민 자본주의의 고착에 힘쓴 내 아버지와 천민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고 바라나 신자유주의라니 제길, 이러면서도 그에 포섭된 채 살아가는 나만큼이나 큰 간극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 빈 프리트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서라도 그 딸이 살고 있는 세상에 다가가 보겠다고 다짐한다. 딸은 아버지의 행동을 가소로워 하지만, 그래요 해볼 테면 해보세요, 하는 심정인 듯 동행한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들른 한 가족의 파티 자리에서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한다. 역할 놀이를 통해 무언가를 딸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던 아버지는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의 반주를 시작하고, 딸은 억지로 그러나 끝까지 그 노래를 부르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 모두가 영웅을 찾죠. 사람들은 존경할 누군가가 필요해요. 난 원하는 걸 채워줄 사람을 찾지 못했어요. 살아가기 외로운 세상 그래서 스스로 의지하는 법을 배웠죠. 난 오래전 결심했죠. 그 누구의 뒤도 따르지 않겠다고. 내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적어도 난 내 믿음대로 살았어요. 나에게서 무엇을 앗아가도 나의 품위는 빼앗을 수 없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가장 위대한 사랑을 내 안에서 찾았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은 쉽게 얻을 수 있어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 혹시라도 당신이 꿈 꿔 온 그 특별한 곳이 당신을 외로운 곳으로 이끌더라도 사랑에서 힘을 찾아요.”


영화 속의 아버지와 딸도 괴롭고, 영화 밖의 나도 괴롭고, 그리고 이런 영화를 볼 리 없는 아버지도 어딘가에서 괴로워하겠거니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딸이 떠난 후 계단에 앉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괴로워하고, 딸은 얼마 후 자신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버지의 엄마, 딸의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재회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꽤 세밀하고 자잘한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뒤집어 쓴 털복숭이 옷처럼 정체를 꼭꼭 감추고 있고, 그렇게 정체가 불분명한 채로 갈등은 봉합된다. 딸은 털복숭이는 끌어안지만 아버지를 끌어안지는 못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거대하고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갈등도 자리잡고 있는데, 그로 인한 갈등의 해소에는 가까이 갈 수조차 없다.



“문제는... 이것저것 하는 사이에 인생이 지나가버려. 순간을 붙잡아 둘 순 없잖니. 가끔 앉아서 떠올리곤 해. 네가 자전거 배우던 때랑 예전에 너를 버스정류장에서 만났던 때를.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깨닫지. 막상 그 순간에는 깨달을 수가 없어.”


딸은 아버지가 살았던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의 결과물과도 같은 아버지를 통해 그 세상을 밀어낼 뿐이다. 어쩌면 나도 그렇다. 아버지는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고, 그 세상에 휩쓸려 있는 딸의 힘겨움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쩌면 나의 아버지도 그럴지 모른다. 이것저것 하는 사이에 인생은 지나가버리고 막상 그 순간에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삶이다, 라는 영화 속 빈 프리트가 딸에게 하는 말은 역시 아버지의 말에 가깝겠지만, 나로부터도 멀지 않은 말이다.



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 마렌 아데 감독 / 산드라 휠러, 페테르 시모니슈에크 출연 / 162분 / 20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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