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지극한 감정을 무심한 문체에 살짝 올려 놓은 채로...

by 우주에부는바람

눈에 선한 감정이나 손에 잡힐 듯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어렵다. 눈에 선하지만 눈앞에 있지 않고, 손에 잡힐 듯 하되 손 안에서 살펴지는 법은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가 깃들어 있는 무수한 오브제들의 탄생은 그래서 가능하다. 게다가 사랑은 언제나 역사를 지닌다. 어떤 사랑이든 그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되돌려 보아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아일랜드의 라스모이 마을의 그해 여름, 이 우리가 책에 실린 사랑을 들여다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그 남자가 다시 라스모이에 나타나면 길 반대편으로 갈 것이다. 말을 걸면 가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고해성사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창피하겠지. 바보 같은 짓이니까. 그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면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려 해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pp.74~75)


이제 막 죽은 아일린 코널티 부인의 장례식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 장례식의 주인공,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비롯해 코널티 부인의 딸인 코널티 양이 있고, 그 장례식에 참석한 동네 사람들이 있고, 그 사이에 덜러핸의 집에 가정부로 왔다가 이제 그 부인이 된 엘리가 있고, 우연히 그 마을에 들렀다가 장례식을 보게 된 플로리언이 있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모르는 이들이 거기에 모두 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프롤리언은 엘리 딜러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주춤했다. 셜해나 하우스는 이제 팔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권은 벽난로 선반 위에 있었고 남은 일은 짐을 꾸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시작하지도 않은 일을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p.164)


마을에는 정신이 조금 나간 듯한 오펀 렌도 있다. 오펀 렌은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류들을 간직하고 있다. 엘리의 남편인 덜러핸은 사실엘 리가 오기 전에 실수로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죽은 코널티의 많은 것을 물려 받은 코널티 양은 사실 오래 전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고 낙태의 경험이 있었다. 죽은 코널티는 코널티 양을 몰아붙였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나도 미안해요.” 그가 말했다. “내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앨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나한테 그런 성향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는 때 말을 아끼는”』 (p.251)


라스모이 마을에 들렀다가 엘리를 발견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낀 플로리언 또한 이탈리아의 친척인 이사벨라를 사랑했던 기억이 있다. 그 사랑은 아직도 유효하고, 그런 채로 엘리를 만난다. 고아로 수녀원에서 자라난 엘리는 자신의 마음에 생긴 사랑의 감정에 당혹스럽다. 자신이 배운 사랑이라는 것과 배치되는 사랑의 감정에 온전히 예속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빠져나올 방법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 엘리는 자신을 집으로 들인 이 남자의 비극은 거절당한 사랑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서늘한 진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혼란 속의 한 가닥 선명한 빛처럼 그녀를 찾아왔다. 확실했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엘리가 깨달은 또 하나의 서늘한 진실은 그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겪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고통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이었다.” (p.273)


작가의 문체가 너무 무심해서 잠깐씩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등장 인물들의 감정이 눈에 선하고 손에 잡힐 듯 하여서 놀란다. 이러한 환기가 윌리엄 트레버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극한 감정을 무심한 문체에 살짝 올려 놓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깊게 휩쓸려 가지 않고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 사랑을 느끼기보다 생각하기에 좋다.



윌리엄 트레버 William Trevor / 민은영 역 / 여름의 끝 (Love and Summer) / 한겨레출판 / 297쪽 / 20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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