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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0. 2024

전성원 《길 위의 독서》

멈추지 않고 책을 읽어내는 일이 고양시키는 한 인간의 여전한 가능성...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웹 사이트 이름이 낯설지 않다. 문화를 다루는 많은 웹 사이트들이 명멸하는 동안 여태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나보다. 《황해문화》라는 이름의 계간지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지극히 중앙집권적인 대한민국의 문화 환경에서 이십여 년 이상 (1993년 창간된 것으로 확인된다) 명맥을 유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희귀하다. 저자인 전성원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 운영자이자, 《황해문화》의 편집장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타인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불행히도 사랑할 여력이 없다. 나는 오랫동안 그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내 척추가 단단해지길 바라왔지만, 채 여물기도 전에 구부정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여전히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편하다.” (p.35)

  책에는 ‘바람구두 인생 서평’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그래서 책에 실린 서평들에는 그만큼이나 진솔한 작가의 사적 이력이 덧붙여져 있다. 사적인 이야기가 항상 앞서고 있어서,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책에 빠져들기 전에 그의 내력에 먼저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결국 작가가 살아온 내력과 그가 읽어낸 책들이 아귀를 맞춰가며 그를 여기까지 굴러오도록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감은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한 이래로 나에겐 매우 낯익은 감각이었다. 나의 하나뿐인 누이가 스물아홉 살에 자신의 가계부에 적어놓은 글을 우연한 기회에 훔쳐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내 나이 스물하고도 아홉. 그녀의 엄마는 스물아홉에, 덜 여문 까만 머리 둘을 남기고 가방을 챙겼다. 여린 손아귀에 파란 사과 한 알씩을 쥐어주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그 소리, 그 딸에 그 어머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손엔 가방을, 왼손엔 파란 사과 한 알, 내 나이 스물하고도 아홉.”』 (pp.42~43)

  조부와 아버지가 연거푸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해야 했던 유년이 만들어낸 굴곡에 더해 청소년기의 이른 무브먼트가 만든 절망까지를 돌파하도록 만든 것의 팔 할은 아마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라는 오브젝트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조금 늦게 대학을 다녔고 이후 광고 회사를 거쳐 지금의 《황해문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 사이 계속 책을 읽었고, 자신이 운영하는 웹 사이트에 서평을 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를 낭만화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문제의 해결 또는 망각뿐이다. 문제의 해결, 원인의 해소가 아닌 망각으로 얻은 낭만은 머지않아 비극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징벌로 돌아온다.

  불의한 권력은 언제나 기억 대신 망각을 말한다. 이제 불행했던 과거는 잊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용서하고 협력하라고 한다. 불의한 권력이 오늘을 차지하면 그들은 과거마저 장악한다. 조작된 기억과 망각을 통해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 힘을 통해 내일도 독점한다. 정의 없는 권력, 사과 없는 용서, 기억이 아닌 망각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번복될 수 있다.“ (pp.127~128)

  그가 서평을 통해 챙기는 책들 중에는 그의 삶만큼이나 비주류적인 것들이 많다. 특히나 두 번째 챕터인 <타인의 고통>에서 다뤄지고 있는 책들이 그렇다.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고통에 감응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챕터인 <자기성장의 길>에서 토로된 사적 내력이 짓뭉개지지 않고 잘 자라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세 번째 챕터인 <시대와의 공명>에 이르면 그 감응이 사회적인 울림으로까지 확장된다.

  “노동과 예술 그리고 교양은 결코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은 ‘교양’이란 말을 쉽게 하지만, 교양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몫일 뿐, 부모가 강제로 보낸 학원이나 돈으로 쌓은 경험, 남들 앞에서 약간의 지식을 들이대며 우쭐거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소유는 이 세계 속에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pp.313~314)

  서평집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길 위의 독서》는 멈추지 않고 책을 읽어내는 일이 어떤 식으로 한 인간을 고양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박한 실례가 되고 있다. 모든 책은 이미 내 손에 도착하였으므로 과거 완료형임을 잘 알지만, 동시에 미래로 향하는 하나의 입구임을 또한 모르지 않는다. 작가가 마지막 챕터의 제목으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선택한 것은 작가가 스스로 이뤄낸 책을 통한 고양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임을 실토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성원 / 길 위의 독서 / 뜨란 / 399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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