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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1. 2024

조지영 《아무튼, 외국어》

나는 여태 외국어 하나의 공부도 미루고 있는데...

  까까머리 중학생 때였을 거다. (우리 때만 해도 외국어는 곧 영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외국어는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야 공부하는 것이 순리였다.) 아임 어 보이 유 알 어 걸, 을 외치던 무렵 매일 선생님은 숙제를 하달했다. A4 용지에 깨알 같은 크기의 글씨로 영단어 몇 개를 가득 채워서 수업 시간에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손아귀의 힘이 다 빠질 정도로 쓰고 또 썼다. 시간이 흘러 나는 (우리는) 볼펜 두 자루를 칭칭 감은 다음, 한 번에 두 줄을 채우는 신공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숙제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그 언어일 수밖에 없는 개성과 그 개성이라는 예쁜 말 뒤로 어마어마한 협곡이 있다. 협곡을 건넌 사람과 건너기 전에 멈춘 사람, 협곡에 빠진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대체로 협곡이 보일 즈음에 멈췄거나, 빠졌다가 겨우 나와서 가던 길 안 가고 반대로 돌아왔던 것 같다...” (p.18)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제2외국어를 선택해야 했을 때 프랑스어를 선택했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프랑스어 담당인 선생님은 하필이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번호가 나와 같았다. 으레 누군가를 지목해야 할 때면 그 번호를 외쳤고 나는 지목 당했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당시의 프랑스어 선생님이 그 지역의 전교조 지부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련하여 선생님이 재판을 받을 때 자양동에 있던 동부지법 근처에서 열렸던 시위에 참가했다.

  “... 독일어에는 예외가 많지 않다고 한다. 대신 규칙이 너무 많다고 알려져 있다. 무리해서라도 많은 규칙 속에, 가능한 한 모호함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언어다. 단어들, 문장들 속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겠다는 결기가, 언어에서도 전해지는 것 같다.” (p.72)

  외국어를 그러니까 영어를 계속해서 공부했지만 능숙해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난 거리낌이 없었는데, 어쨌든 여기는 한국이고 한국에서는 한국어 능통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학동에서 근무할 때 길을 묻는 외국인과 자주 마주치곤 했다. 나는 내 영어가 is not good 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그보다 나으니, 당신의 메시지를 적어 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목적지를 중심으로 하는 간단한 지도를 그려 돌려주었다.

  “정말로 스페인어는 정다운 언어 같다고 생각한다... 스페인어를 들으면, 정말이지 독일어는 세상 무뚝뚝하고, 프랑스어는 살짝 간질거리는 것 같고, 영어는 새삼 밍밍하다...” (p.89)

  결혼을 하고 곧이어, 일본 드라마 <롱 바케이션>을 보며 기무라 타쿠야에게 푹 빠져버린 (책에도 일본어에 빠져드는 코스로 소개되는 그 전형적인 코스) 아내는 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어 학원 새벽반을 끊고 다니기 시작한 아내는 그 짓을 삼 년 동안 지속했다. 내 기억으로 아내가 수업에 빠진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학원의 모든 수업을 클리어 했고, 아내는 이후 몇몇 회사를 거쳐 지금은 일본인이 사장으로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는 일은 국어 교재를 만든다.

  “투숙료는 없지만 투숙객의 유일한 의무가 하나 있었는데, 다음 날 아침 미사를 참례하는 것이었다. 해도 뜨기 전의 아침 미사는 경험해본 적도 없는데 하물며 독일어 미사라니, 벌써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늦지 않으려고 알람을 6시 반에 맞춰놓고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사방이 깜깜한 밤이었다. 청빈과 절제가 공기처럼 스며 있는 수녀원에서는 빛이 있을 때 밝고 없을 때는 어두웠다...” (p.58)

  두 달 전쯤 아내가 인터넷 영어 강의 수강권을 신청했다. 내게도 권하여 나도 듣기 시작했다. 하루에 십여 분만 투자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젠장, 아내는 하루에 두 시간은 투자를 하는 것 같다. 동시접속이 되지 않는 탓에 나는 접속할 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맞다, 핑계에 불과하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불어, 스페인어, 독일어, 일본어 그리고 지금은 중국어를 조금씩 공부했고 공부하는 중인 듯하다. 아내는 일본어를 마스터하고 이제 영어에 뛰어들었다. 나는 여태 영어 공부를 미루고 있고...


조지영 / 아무튼, 외국어 / 위고 / 163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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