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허구인 소설 안에 다시 한 번 허구처럼 가두어져, 더욱 도드라지는 현실.

by 우주에부는바람

《사탄탱고》가 출간된 것은 1985년이고 헝가리의 어느 농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85년이라면 동구권의 몰락이 가시화되기 직전이다. 우리는 몰랐지만 오히려 그들은 (그러니까 동구권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진행이 음울하기 그지없는 것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소설의 구석구석이 환영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아직 작가가 동구권이라는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인 잃은 노예들인 주제에 명예와 자부심과 용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들 하지. 그 믿음으로 저자들은 살아가는 거야. 둔한 마음 깊은 곳에선 저런 덕목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저 말들의 그늘 속에서 살고 싶은 것뿐이니까.” (p.71)


소설은 후터키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그가 속한 마을의 사람들은 쇠락의 절정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그들은 쉽사리 떠나지 못한 채 쩔쩔 매고 있는 중이다. 후터키도 그 중 하나이고, 방금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슈미트 부인도, 남편인 슈미트도, 크라네르와 크라네르 부인도 그렇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죽은 줄만 알았던 인물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공유한다.


“...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러 사람이 애를 써야만 알아낼 수 있는 법이었다. 거듭해서 조금씩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진실은 빛 아래서 낱낱이 드러나고, 사건들을 돌이켜 검토하면 원래 이야기에서 어떤 순서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p.145)


소설은 두 개의 큰 챕터로 나뉘는데, 첫 번째 챕터에서 마을 사람들은 술집에서 이리미아시를 기다리는 중이다. 몰락한 마을의 사람들은 낡은 술집에 모여든다. 술에 취한 농부가 행패를 부리고,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들의 욕정은 발산되거나 수렴된다. 어디에든 있을 법한 광신자가 허깨비처럼 뇌까리고, 망나니 오빠와 몸을 파는 누이를 가진 어린 소녀 에슈티케가 죽는다. 어린 소녀가 죽었다.


“난 예전엔 잘못 생각했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네. 나와 벌레, 벌레와 강물, 강물과 강물을 넘어가는 고함 소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pp.321~322)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는 돌아오자마자 소녀의 죽음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이제 사람들은 이리미아시의 말에 따르기로 작정한다. 그들은 마을을 떠나기로 하고 떠난다. 삼 년 동안 하지 못하던 일을 순식간에 진행시킨다. 그들은 희망을 주입받았지만 그 희망은 실낱같다. 그들은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번민하고, 죽은 소녀의 환영을 본다.


“정말로 내가 정신을 어느 정도 집중하기만 하면 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쓰기만 하면 그 일이 일어난다니. 사건이 일어나는 방향을 어떻게 정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p.389)


소설의 첫 번째 챕터는 1번 소챕터에서 시작되어 6번 소챕터로 진행되고, 두 번째 챕터는 6번 소챕터에서 시작되어 1번 소챕터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소설이 시작되는 장면과 소설이 끝나는 장면이 겹친다. 이미 허구인 소설의 내부에서 다시 한 번 이것들이 허구임을 강조하는 명장면이다. 그 시대의 작가는 그곳에서, 이런 식의 강한 현실 부정을 통하여 고스란히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 조원규 역 / 사탄탱고 (Satantango) / 알마 / 408쪽 / 2018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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