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어빙 《일년동안의 과부》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신빙성에 집중하다보면...

by 우주에부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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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의 부모가 그녀를 셋째 아들로 기대했다는 사실이 루스 콜이 작가가 된 이유는 아니었다. 루스의 상상력은 죽은 오빠들의 사진이 어머니와 아버지보다 더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집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p.12, 1권)


존 어빙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면서도 치밀하다. 여느 작가라면 이처럼 섣부르게 이제 제 살배기인 루스의 미래를 소설의 가장 앞쪽에서 밝히고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이를 알려줌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을 들쑤시는 쪽에 가깝다. 네 살배기 루스가 자신의 엄마인 매디언과 십대 아르바이트 사이의 섹스를 보게 되는 장면 다음에 등장하는 내용이니 더욱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엑시터 연감에서 루스를 심드렁하게 들여다본 에디는 계속해서 루스를 1958년 여름에 잠든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가엾은 꼬마‘로 기억하게 된다. 루스 콜은 그로부터 22년 후인 스물 여섯 살에 첫 소설을 출간하게 된다. 에디 오헤어가 그 책을 읽을 때는 서른여덟일 테고 오직 그제야 에디는 루스 안에는 테드보다는 매리언의 모습이 더 많다는 걸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루스가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에디는 루스 안에는 테드나 매리언보다 루스 자신이 더 많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p.282, 1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작가는 이후에도 루스 콜의 미래에 대해 스스로 스포일러가 되기를 서슴치 않는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십대의 두 아들을 잃고 이제 십대의 아르바이트 생과 관계를 이어가는 매리언 콜, 어린이 책을 쓰면서 자신의 독자인 아이들의 엄마를 꼬시는 일에 열심인 테드 콜, 그리고 어린 루스 콜로 이루어진 콜 집안의 분위기는 그 자체로 극적 긴장감을 제공한다.


“루스는 가장 훌륭한 세부 묘사란 기억이 아니라 선택에 기반한 세부 묘사라고 주장했다. 허구의 진실은, 저널리즘의 진실에 다름 아닌 관찰의 진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세부 묘사는 소설의 인물이나 사건이나 분위기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허구의 진실이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야기 내에서 일어났음직한 일이다.” (p.79, 2권)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일년동안의 과부》 또한 어느 시점에서 훌쩍 시간을 건너뛴다. 소설의 첫 번째 챕터가 1958년 여름, 인데 두 번째 챕터는 1990년 가을이다. 어린 루스 콜은 이제 엄마 매디언의 나이가 되었고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매디언과 관계를 맺던 에디 또한 작가가 되었지만 루스 콜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네 살배기 루스와 에디를 떠난 매리언은 그때 이후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하리는 주로 소설을 읽었다. 소설에서 인간 본성의 참다운 묘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리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인간의 가장 나쁜 행동이 바뀔 수 있다는 암시를 결코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캐릭터를 도덕적으로 지탄할 때도 있지만, 소설가는 본래 세상을 바꾸는 개혁가가 아니다. 소설가는 평범한 수준 이상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좋은 소설가는 그럴듯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따름이다.” (p.192, 2권)


오히려 생각하지 못한 시점에 하리라는 네델란드 경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또한 작가의 큰 그림 안에서 준비된 인물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나게 된다. 루스는 자신의 책에서 다룬 ’일년동안의 과부‘ 이야기의 실제하는 버전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처럼 루스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녀를 구해주는 인물이 바로 하리인 것이다.


『“그녀는 1년 동안 과부였다.” 루스 콜은 썼다. (그녀 자신이 과부가 되기 불과 4년 전이었다.) ... 훌륭한 소설가는 무엇이든 (진실되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던 루스였지만, 이제 그녀는 모든 걸 미리 알 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실생활의 경험은 과대평가된 게 분명하다는 주장도 곧잘 했던 루스였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과부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상상했던지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p.265, 2권)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그의 천부적인 이야기꾼 기질을 독자들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을 건너 뛰면서 생길 수 있는 캐릭터의 이질감 같은 것은 느끼기 힘들다. 작가는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이야기의 신빙성에 더욱 집중한다. 어떤 작가는 전자가 전달하는 개연성을 중요시하지만 존 어빙은 후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놀라움을 제공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놀랍다.



존 어빙 John Irving / 임재서 역 / 일년동안의 과부 (A Widow For One Year) / 사피엔스 / 전2권 (1권 519쪽, 2권 383쪽) / 2008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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