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폭력은 남자로부터 남자에게로, 이야기는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소설은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마을의 청년 마르지오가 마을의 나이든 아저씨 쯤이 되는 안와르 사닷을 죽였다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시작된다. 죽임도 죽임이지만 죽임의 방식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른다. 마르지오는 안와르 사닷의 목덜미를 물어서 죽였다. 그리고는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경찰서에서 자신의 몸 안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다. 배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오장육부 말고 다른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마르지오에게 그를 죽이라고 시켰다고 했다. 그게 힘이 셌어요, 그래서 아무 무기도 필요 없었다고 경찰에게 말했다...” (p.52)
소설은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장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현재의 사건의 발단이 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낸다. 어쩌면 그 시작점에는 동네의 이야기 할머니로부터 들은 호랑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의 호랑이는 먼 곳으로부터 할아버지를 거쳐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마르지오에게 찾아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 무아는 암호랑이가 주인의 몸 안에 살면서 위험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한다고 했다. 마르지오의 할아버지는 하얀 암호랑이를 거느렸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할아버지는 호랑이 얘기를 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야수를 길들이기에는 넌 아직 너무 어려,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기만 했다....” (p.66)
하지만 호랑이라는 환상 속의 무언가가 현실의 사건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 마르지오의 아버지 코마르는 살인 사건의 또다른 기원일 수 있다. 열 살이 어린 아내 누라에니를 맞이한 코마르는 짐승에 가깝다. 누라에니는 코마르의 아내라기 보다는 육욕의 배설 창구였을 뿐이고, 그렇게 태어난 마르지오아 마메는 그 육욕의 결과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코마르에게 취급되었다.
“집은 황량했다. 그는 부모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두 사람은 이렇게 살면서 서로를 괴롭히고 벌주는 데만 열중할까? 코마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내의 냉소와 비웃음을 참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이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했다. 그자는 제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데 잠시라도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pp.138~139)
코마르가 기원이라기 보다는 코마르에 의하여 자신을 상실한 그의 아내 누라에니야말로 이야기의 기원일 수 있다. 누라에니는 자신의 자식에게도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코마르와 이야기하는 대신 살림살이인 곤로와 냄비와 대화를 나눈다. 그런 누라에니가 마을의 유명한 바람둥이인 안와르 사닷과 정분이 난 것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기도 힘들다. 문제가 있다면 안와르 사닷의 막내 딸 마하라니와 누라에니의 아들 마르지오가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제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가 서로를 향한 각자의 균열과 증오를 감추지 못했다.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순간이었다. 코마르는 감히 아들의 눈을 똑바로 보지는 못하고 힐끗 훔쳐보다가 다시 손가락 사이의 담배로 시선을 돌렸다. 마르지오는 눈을 반쯤 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잘 모르겠는 채 제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마메만이 차분했다. 마메는 물동이를 부엌으로 나르고 방으로 돌아가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누라에니는 아주 잠깐 아들 쪽을 보았다가 어쩌면 영원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잠든 아기를 바라보았다.” (p.193)
소설은 끔찍한 살인이라는 현재의 사건을 미리 밝히고 그 근원을 찾아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쇠락한 가부장제 전통이 아직 유효해 보이는 곳에서의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이 야기하는 고통의 연쇄작용이 환상 속 호랑이라는 상징의 자장 안에서도 뚜렷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 할머니 마 무아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자질이 엿보이는 작가의 롤 모델로 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은 그만큼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에카 쿠르니아완 Eka Kurniawan / 박소현 역 / 호랑이 남자 (Lelaki Harimau) / 오월의 봄 / 205쪽 / 2018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