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다이닝에 어울리지 않는 이 폭폭한 현실 속의 이야기들...
십여 년 전이었을까. 아내가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아산병원의 중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했다.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이었고, 식당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식사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넓은 식당의 한 켠에서 힘겨운 구토 소리가 났다. 젊은 여인이 붉은 국물의 짬뽕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그녀가 한 젓가락을 입으로 삼키고 나면, 옆에 있는 나이든 여인이 비닐 봉지를 젊은 여인 쪽으로 가져다댔다. 젊은 여인은 힘겹게 비닐 봉지에 먹은 것을 게웠고, 나이든 여인은 비닐 봉지를 제 품으로 거둬들였다. 나를 포함한 몇몇 손님들, 환자이거나 환자의 보호자일 사람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곧 시선을 거뒀고 구토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비워내는 일에 열중했다. 환자복을 입은 젊은 여인은 듬섬듬성 난 머리카락으로 창백하게 말라 있었고, 나이든 여인은 눈물을 훔쳐 내며, 젊은 여인의 등을 두들겼다 쓸어내렸다를 반복했다.
최은영 「선택」
“언니는 그 후로도 제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언니가 처한 사정에 대해 저는 룸메이트 수녀님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물어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회사는 여승무원 전원을 비정규직으로 계약했습니다. 언니가 비정규직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회사는 채용 공고에서 2년 뒤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입사한 지 2년의 시간이 지나자 회사는 앞으로도 직접 고용은 없을 것이며, 다른 위탁 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회사는 승무원들의 실제 사용자였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회사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해고라는 말은 협박이었어요.” (p.25) 누군가는 말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우리의 작가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작가들이 주로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가들이 더욱 정확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제야 겨우 그 변화의 실마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옳다고 해서 이기고, 옳지 않다고 해서 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강함과 약함이 있을 뿐이겠지요. 강한 쪽은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한 쪽은 최소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부를 걸어야 해요...” (p.25)
황시운 「매듭」
스스로는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로프의 매듭 하나 맬 수 없는 남편, 그런 남편을 두고 식당에서 낙지 대가리를 자르며 안달복달해야 하는 아내... 그리고 이 폭폭한 현실을 근거리에서 토막내고 있는 사람들...
윤이형 「승혜와 미오」
“... 엄마도 모르겠어.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마 그건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야...” (p.97) 어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주는 사람들이 반가울 수 있다. 여기 만난 지 4년 그리고 함께 산 지 3년이 된 커플 승혜와 미오가 그렇다. 이성애자의 눈으로 가치를 판단하려 하지 말고, 인간의 눈으로 그 가치의 판단을 유보하는 것만으로도...
이은선 「커피 다비드」
“고마웠소. 노란 불빛만으로도 내 마음 다잡고 물질하려 들어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오. 사람이 홀로 고독허믄 이런 불로도 마음을 뎁히고 그러고 사는 거시제라. 내 그리 살았소. 꼭 우리 아덜 같아서 볼 때마다 맘이 그렇게나 조트라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소. 거시기 전복 이빨은 꼭 짤라내야 해. 안 그럼 속 긁어. 안다고라? 오메, 똑똑한 그.” (p.122) 조그만 어항을 끼고 있는 동네의 로스팅 커피 가게라고 해야 할까. 커피 냄새와 비린내의 조합을 시도하고 있다.
김이환 「배웅」
육신을 담보로 영생을 얻게 된다면, 그러니까 나의 몸은 사라지고 정신만 남아 그 정신이 중앙 컴퓨터의 서버에 업로드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어쩌면 그러한 선택의 여지가 있어도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그들에게는 초콜릿이든 무엇이든 실제로 자신들이 향유할 수 있는 맛이라는 것을 붙잡을 수도 있을 텐데...
노희준 「병맛 파스타」
‘정리하자면, 여혐은 남혐의 투사고, 남혐은 여혐의 내사지.’ 혹은 ‘남혐은 여혐하는 남자의 뒤통수 보기야. 남자는 보지 못하는 남자의 이면, 그 초라한 뒷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지.’ 와 같은 문장들... 나나 가빈이나 병맛인 것에는 큰 차이가 없고, 페이스북과 페친과 페이스북 알림음과 각종 요리 재료들이 난무하는...
서유미 「에트로」
“집에 대한 고민은 새해맞이 케이크로 어떤 걸 고를까, 처럼 간단하거나 달콤하지 않았다. 그대로 살겠다는 건 돈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고 이사를 가겠다는 건 서울 밖으로 밀려나거나 큰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이 딸린, 두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했다. 휴식의 시간이 줄어들거나 휴식의 공간이 좁아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나을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p.219) 빵집에서 일 하는 내가 케이크를 팔기에도 바쁜 때, 그리고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집과 관련하여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 집을 알아보러 돌아다니는 중 엎어진 케이크를 생각해야 하는 때, 한 해의 마지막 날, 나의 나이는 서른...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소설집의 제목인 ‘파인 다이닝’과 어울리지 않는다. 몇몇 요리가 등장하고 요리 재료들이 등장하고 커피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파인 다이닝’에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다. 요리를 테마로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요리는 이 소설들이 놓인 테이블의 어느 한 구석에 요령껏 접혀 있는 냅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리 테마 소설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최은영, 황시운, 윤이형, 이은선, 김이환, 노희준, 서유미 / 파인 다이닝 / 바통 / 230쪽 / 2018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