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모양을 본 적 없는 우리를 향해 재촉하는 감독의 어떤 사랑 혹은 경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종류는 근미래 SF 장르물이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물이다. (감바레를 외치는 일본 영화에 종종 경도되기도 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물에 로맨스가 결합된 경우인데, TV 드라마는 로맨스와 수사극만을 좋아하는 아내의 취향에 금상첨화였던 모양이다. 영화가 끝나자 아주 좋았어,를 연발하였다. 감독의 다른 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의 세 개의 열쇠>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대의 모습을 볼 순 없지만 그대가 내 곁에 있음을 느끼네. 그대의 존재가 사랑으로 내 두 눈을 채우고 내 마음을 겸허하게 하네. 그대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영화는 물 속의 엘라이자로부터 시작된다. 부양되어 있던 엘라이자 그리고 사물들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우리는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 물이고, 엘라이자가 수중에 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물이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 사이 엘라이자는 깨어나고, 우리는 물의 모양을 본 적이 없으므로, 엘라이자가 물 안에 있다가 물의 바깥으로 나온 것인지, 여전히 물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내부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도 알 수 없고 엘라이자도 모른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영화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엘라이자의 이웃인 화가 자일스는 시대를 특정하기를 주저한다. 그 시대는 아직 냉전의 시대이고, 인종차별, 성차별이 엄연한 시대이다.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가 나뉘어 있고, 정상인과 장애인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다르게 대접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이, 인간에 의한 인간 아닌 것에 대한 박해가 자연스러운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면 지금은? 화가 자일스가 왜 시대를 특정하기를 주저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지금은 트럼프의 시대이기도 하다)
‘시간은 과거로부터 흐르는 강물이다.’
그때는 우주 개발의 시대이기도 하고 미래를 꿈 꾸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희망으로 가득한 시대여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화가 자일스는 자신이 그린 포스터가 사진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엘라이자의 동료 젤다는 일과 게으른 남편의 수발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며, 수조 속의 괴생물체는 실험 대상이 되어 전기봉의 세례를 견뎌야 한다.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소릴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그리고 이제 엘라이자와 괴생물체 사이의 기이한 사랑이 시작된다. 물 속에 살며 신의 대접을 받던 괴생물체와 물에서 건져진 고아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청소부 엘라이자는 어떤 차별이나 구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욕실을 물로 가득 채운 채 사랑을 나누고 비가 오는 날 운하를 통해 바다로 나아갈 궁리를 한다. 물론 그런 그들을 돕는 것도 인간이고 그런 그들을 쫓는 것도 인간이다.
‘삶은 부서진 계획의 파편에 불과하다.’
셰이프 오브 워터 The Shape of Water, 그러니까 애초에 형태를 정의할 수 없는 물처럼 영화는 어떤 식으로 보아도 좋겠다. 종을 뛰어 넘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도 관람에 지장이 없고, 과거 회귀의 양태를 보이는 지금의 시대에 대한 경고로 읽어도 의미가 없지 않다. 존재하는 모든 차별을 향한 인류애를 가득 품은 도그마로 받아들여도 상관이 없다. 그건 그렇고 아내의 아주 좋았어, 의 포인트는 어디였을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The Shape of Water) /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샐리 호킨스, 더그 존스, 마이클 섀넌, 리차드 젠킨스 출연 / 123분 / 2018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