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판단을 무력하게 만드는, 예측불가능한 우리의 리얼 세상...
*2018년 4월 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아주 좋은 책, 꽤 괜찮은 영화 만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책도 쉬지 않고 보고 영화도 적잖이 보지만 더더 그렇다. 그래서 이번 주는 특별하다. 에카 쿠르니아완의 소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는 좋다, 를 넘어 훌륭한 소설이었고 마틴 맥도나가 각본을 쓰고 감독하였으며 프란시스 맥도맨드, 샘 록웰, 우디 해럴슨 등이 출연한 영화 <쓰리 빌보드>는 괜찮다, 를 넘어 의미심장한 영화였다.
영화의 제목 그대로 미주리 주 에빙 시의 외곽에 있는 버려진 도로, 버려져 있던 세 개의 광고판에 어느 날 이런 문구가 실린다. “RAPED WHILE DYING”, “AND STILL NO ARRESTS?”, “HOW COME, CHIFE WILLOUGHBY?” 죽어가는 동안에도 강간당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윌러비 서장? 이런 의미의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광고이다. 그리고 이 광고판을 임대한 것은 바로 딸이 살해당했고,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엄마 밀드레드이다.
마을의 경찰 서장 윌러비는 난감해하고, 경관인 딕슨은 화를 낸다. 잡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잡지 못한 것일 뿐인데, 밀드레드의 광고는 그들의 무능력을 광고하는 것에 다름없다고 여긴다. 게다가 월러비는 췌장암을 앓고 있고, 나을 가망은 없다. 마을 사람들도 밀드레드의 행동이 과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다. 밀드레드는 멈추지 않으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멈추기를 원한다. 그리고 얼마 후 윌러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두 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 마지막 피크닉을 다녀온 다음의 일이다.
밀드레드의 광고판에 불이 난 것은 그 다음의 일이고, 마을의 경찰서에 불이 난 것은 또 그 다음의 일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밀드레드와 윌러비 서장, 밀드레드와 딕슨 경관, 밀드레드와 광고업자 웨비, 밀드레드와 전남편인 찰리, 밀드레드와 왜소증의 제임스, 밀드레드와 아들 레비 그렇게 밀드레드와 사람들 사이는 벌어지고 메꿔지고 메꿔지는 듯하다 또 벌어진다.
그 틈을 중심으로 영화는 뱅글뱅글 돈다. 우리를 편한 길로 인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나 가치 판단을 영화는 철저히 거부한다. 선과 악, 호와 오, 가해자와 피해자, 정의와 불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딸을 잃은 엄마는 딸에게 악담을 퍼붓는 엄마이기도 했고 방화범이기도 하다. 무능력한 윌러비 서장은 가정적인 아버지이자 남편이었으며, 밀드레드의 광고판 연장을 위해 기부를 한다. 지독한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데다 마마보이인 딕슨 경관은 밀드레드 딸의 사건 파일을 불덩이에서 지켜낸다.
가해자인 범인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가해자이지만 가해자가 아닌) 가짜 가해자만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피해자인 딸의 모습은 아주 잠시 회상 신에 나오거나 대화 중에 나타날 뿐이다. 대신 영화 속의 나머지 인물들이 끊임없이 가해자의 자리에 들어섰다가 다시 피해자의 자리에 들어서기를 반복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가짜도 진짜도, 분노도 용서도, 가책도 증오도, 반성도 행동도 모두 하나의 몸뚱이에 오롯이 존재한다.
영화는 커다란 폭발 후 안정되어 있던 휴화산이 또다시 갑자기 토해내는 용암처럼 느리게 그러나 빠르게, 멀리서 그러나 가까이서, 차갑게 그러나 뜨겁게 흘러가는 모양새를 띤다. 영리하기 그지없는 감독은 자신의 영리함을 요령껏 감추고 있다. 꽤 많은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어찌나 잘 소화해내고 있는지, 많은 이들이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여길 정도이다.
영화는 끝까지 카타르시스 그러니까 어떤 감정의 해소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영화는 우리가 느낄 수 있을 법한 그러니까 강도와 깊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법한 온갖 감정들을 광고하는 것만 같다. 양심과 도덕과 원한과 분노와 복수와 화해와 용서가 하나의 넓은 쇼 윈도우 안에 진열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다. 밀드레드와 딕슨이 외부자인 가짜 가해자 앞에서 의기투합하여 차를 타고 떠나는 순간까지 어떻게, 를 결정하고 있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 라며 행동을 말리지만 또 동시에 희망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라며 행동을 추동하는 아이러니의 총집합과도 같은 영화였다. 어떤 문제의 해결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한 해석 가능성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쨌든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의 판단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실은 이 예측불가능한 세상의 실제 모습이다.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 마틴 맥도나 감독 / 프란시스 맥도맨드, 우디 해럴슨, 샘 록웰 외 출연 / 115분 / 2018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