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미나 레자 《함머클라비어》

힐끗 바라보고 내처 걸아가는, 무심한 척 하지 않는 무심함...

by 우주에부는바람

*2018년 3월 2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야스미나 레자는 <대학살의 신> (이월 초까지 공연이 있었다) 그리고 <아트> (얼마 전까지 공연을 했다) 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다. 오래전 <대학살의 신>을 연극열전의 작품들 중 하나로 관람했다, 는 기억이 있다. 허세 가득한 중산층 부부의 허위 의식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벗겨진 가식이 신랄한 가운데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일상의 소사가 가득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연주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연주를 계속한다. 내가 눈물을 흘려야 마땅한 상황이다. <함머클라비아>는 일그러지고, 내 아버지는 죽어간다. 어둑한 빛 속에서 파멸의 온갖 징후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내게서 치밀어오르는 것은 웃음이다...” (p.19)


《함머클라비어》는 짤막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일종의 자전 소설 혹은 자전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는 아버지의 죽음, 친구이자 에이전트였던 마르타의 죽음을 비롯해 죽음과 가까운 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와 함께 딸인 알타를 비롯해 그녀 모이라, 뤼세트 모제스가 아닌 뤼세트 모제스, 펠릭스, 죽어가는 마문, 조제프 H, 과부 모니크와 같은 여러 인물들이 잠시 등장하고 또 홀연히 퇴장한다. 연극적이다.


“마르타는 나에게 자기 나이를 속였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내 출판 에이전트이자 친구다.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꽃다발을 선물한다. 마르타는 병이 들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녀가 고통을 당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나날이 쇠약해지고 사는 일에 싫증이 난 것 같다. 그녀가 죽은 건 더 이상 삶에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다.” (pp.29~30)


그런가 하면 슈테판 츠바이크에 관한 책 《어떤 삶의 순간들》, 토니 커시너의 연극 <미국의 천사들>,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 롤랑 바르트의 책 《사랑의 단상》,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소설 《화관과 리라》, 이스마엘 카다레의 소설 《대초원의 신들의 황혼》이 거론된다. 그렇지만 작가는 예술지상주의에 반대하는 뉘앙스를 곳곳에 배치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B플랫장조 함머클라비어, 가 있다.


“빌리에 대로 101번지에서 마문이 조용히 죽어간다. 마문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나날이 조금씩 생기를 잃는다. 날씨가 좋으면 그녀는 느리긴 해도 프레르 광장까지 걸어갈 수 있다. 그녀는 함께 간 사람과 그곳 벤치에 앉는다. 거기에서 삶의 마지막 소리를 듣는다. 마치 더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럴 때 그녀의 얼굴에는 무슨 일인지 애써 알아내려는 것 같은 감동적인 표정이 떠오른다.“ (pp.73~74)


작가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삶의 곳곳에 그것을 끼워두는 형태를 띤다. 크게 놀라거나 그렇다고 아예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원래 거기에 있었던 죽음이 어느 날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는 식이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죽음도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죽음도 그렇다. 힐끗 바라보고 또 내처 걸어간다. 무심한 척 하지 않음으로써 무심하다.


“나는 과거 어느 날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 어느 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무관심한 이 두 순간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존재하려 애쓴다. 일정한 방향 없이 계속 동요하는 파동의 형태로.

이 두 부재 사이에서 우리는 걸음이 이끄는 곳으로 나아간다. 세상과 그 공간을 밟고 또 밟는다.

공간과 공간이 있다. 아름다운 장소, 유명한 장소, 몹시 추한 장소 들에 결국 우리는 무심해진다. 그런 장소들은 기껏해야 딱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문화적인 성향에 호소할 뿐이다. 진짜 공간, 우리가 만들어낸 공간, 기억을 품은 공간은 우리가 자신 너머에 있는 것을 본 그런 장소들이다. 우리의 과도함, 우리 욕망의 두려움과 맹세를 중재하는 곳들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 말이다.“ (pp.169~170)


작가는 관계의 깊음에도 얕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보느냐일 터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에는 전쟁 장면을 좋아한다는 여자가 등장한다. ‘인간들의 비극’에는 관심이 없다는 그녀는 전쟁의 배경이 되는 풍광을 좋아할 뿐이다. 그곳에서 죽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그 사람들의 뒤로 펼쳐지는 풍광을 바라본다는 그녀가 인상적이었다.



야스미나 레자 Yasmina Reza / 김남주 역 / 함머클라비어 (Hammerklavier) / 뮤진트리 / 198쪽 / 2016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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