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과학 소설들의 가시권에 들어가 있는 현재를 떠올리며...
아직 테드 창의 유일한 소설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 책에 실린 단편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치밀한 상상력의 논리를 한꺼번에 읽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껴가며 읽을 요량으로 침대 맡에 두었는데 어영부영 그 위로 또 다른 책들이 쌓였다. 그러다보니 소설집의 중간 어디쯤에서 읽기의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 AI에게 지식을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 능력을 갖게 해 고객이 직접 가르칠 수 있는 AI를 판매하는 것이 블루감마사의 목표였다...” (p.18)
그러면서도 테드 창의 중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구매했다. 새로 나온 책이려니 했는데 이미 2013년에 발간되었다. (손에 든 것은 2017년 초판 3쇄본이다.) 이번에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인공 지능이다. 그러니까 인공 지능을 가진 애완 동물이라는 개념에 가깝다. 소설 속에서는 디지언트 digient, 라는 개념으로 상징되는데, 이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 세계인 데이터어스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존재이다.
“... 블루감마사는 십여 명의 마스코트들을 위해 새로운 집을 찾아 줄 필요가 없었다. 동물 안락사에 수반되는 문제 따위는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그냥 정지시켜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애니 자신도 품종 개량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디지언트들을 실행 정지시켜 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당사자인 디지언트들은 죽는 것도 아니며, 유기당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마스코트를 정지시킬 경우 생겨나는 고뇌는 오직 훈련자의 몫이다...” (pp.58~59)
오래전 다마코치, 라는 명칭의 육성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육성 게임은 수도 없이 많다. 소설 속의 디지언트가 현재의 이러한 아바타들과 다른 점은 디지언트 자체 내에 인간과 유사한 AI(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DNA라고 해야 할지)가 탑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의 성장은 오롯이 육성자에게 달려 있고, 거기에 어떤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디지언트 육성을 위한 안내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완동물이나 어리아이를 키울 때의 방법론을 응용해도 성공 확률과 실패 확률이 반반씩이었다. 디지언트용의 육체는 단순하기 때문에, 성장을 향해 항해하는 중에도 유기체의 호르몬이 불러일으키는 역조 현상이나 돌발적인 폭풍 따위로부터는 자유롭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양한 감정을 겪지 않는다거나 성격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디지언트들의 정신은 뉴로블래스트 계열의 게놈이 규정하는 위상 공간의 새로운 영역으로 끊임없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디지언트들이 영원히 ‘성숙’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생물학적 모델에 입각한 발달상의 정체기라는 개념이 디지언트들에게 반드시 들어맞지는 않는다. 디지언트들이 계속 실행되는 한, 그들의 개성 또한 그것에 발맞춰 계속 발달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pp.83~84)
디지언트들은 가상 세계에 살고 있지만 (소설 속의 인간들 또한 현실 세계에서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가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 로봇의 외피를 두르게 되면 현실 세계에 등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디지언트들은 이렇게 로봇의 외피를 두르고 현실 세계를 산책하기도 하고, 좀더 리얼하게 육성자와 관계를 맺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사는 가상 세계인 데이터어스의 제조사가 파산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소설은 새로운 가상 세계인 리얼스페이스로의 이전을 위한 작업 비용, 디지언트들의 성장과 섹스, 디지언트의 법인화와 같은 문제들로 번져나간다.
“... 디지언트들의 성숙함의 기준을 인간만큼 높이 설정하지는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르코가 이번 결단을 내릴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을 수도 있다. 마르코는 자기 자신을 인간이 아닌 디지언트로 여기는 걸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가 한 제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데릭은 마르코가 실제로는 자신의 성질을 데릭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르코와 폴로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간주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대신 데릭의 기대에 억지로 부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마르코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를 인간처럼 대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p.189)
작가의 창작 노트에 따르자면 작가가 책에서 쓰고자 했던 것은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적 관계’ 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계란 ‘관계를 맺은 상대방이 독자적인 욕구를 느낄 수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법’이다. 작가가 소설을 발표하고 8년이 더 흘렀다. 소설 속의 개념들이 아주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호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많은 과학 소설의 가시권에 이미 들어가 있다.
테드 창 Ted Chiong / 김상훈 역 /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 / 북스피어 / 214쪽 / 2013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