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디트 헤르만 《단지 유령일 뿐》

생각해보면 이토록 열렬한 건조함도 사랑의 한 속성이니...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집에 실린 소설 <차갑고도 푸른>에 이런 대화 장면이 나온다. 『... 그는 사실 얘기할 자신이 없었는데도 시작했고 끝낸 뒤에 “너희들 이해하겠니? 하고 의심쩍은 듯 불안하게 물었다. ”이해하겠니?“ 핵심이 없는 이야기,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러면서도 전부인 이야기...』 (p.89) 이 장면에 나오는 ‘핵심이 없는 이야기,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러면서도 전부인 이야기’라는 표현이야말로 유디트 헤르만의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가장 잘 가리킨다.

「루스(여자 친구들)」

『... 나는 루스, 루스를 생각했다. “네가 여기 온다는 얘기, 걔한테 했니?” 라울은 물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고, 그는 기대감으로 나를 바라보며 거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자기 때문에 내가 루스에게 저지르고 만 이 배반이 그를 짜릿하면서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았고, 그는 그 기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p.45) 나와 루스의 관계는 모호하다. 아마도 나는 동성인 루스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루스는 나의 감정과는 다르다고 여겨진다. 루스는 자신이 만나는 남성에 대해 내게 말하거나 소개한다. 라울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현재 루스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다. 하지만 라울의 감정은 미지근하고, 오히려 내게 다가서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나는 루스에게 말하지 않은 채 라울을 만난다.

「차갑고도 푸른」

유니나와 마그누스, 이레네와 요나스,

“... 그의 진짜 표정은 열려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친절하다. 얼굴은 좁고 사내아이 같으며 윤곽이 또렷하고 아름답고, 그 어떤 것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가끔 그의 얼굴이 보기보다 차갑고, 공격적이며, 권위적이고, 단호하고 냉정해 보이는데, 그가 물에서 나오거나 잠을 잘 때 그걸 볼 수 있지만, 솔직히 그가 이 냉정함을 감추고 싶어 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 차가움에 그녀가 거부감을 갖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끌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낯선 사람의 차가움, 어쩌면 수천 년 동안 같이 지낼 수 있지만, 끝내 속내는 알 수 없는 그런 차가움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사실, 차갑고도 푸른 사실. 이레네는 아이슬란드의 이 관용구를 아주 좋아했다.” (p.77) 유니나와 마그누스가 살고 있는 아이슬란드로 마구누스가 독일에 있을 때 사귄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레네 그리고 이레네와 어떤 관계인지 희미한 유나스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유니나는 그때를 떠올리고 그때의 마구누스를 떠올린다. 유니나가 마그누스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 좋아함에 어떤 확신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니나는 계속해서 의구심을 갖는 것 같고 마그누스는 그런 그녀에게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아쿠아 알타」

“... 나는 아쿠아 알타를 생각했다. 왜 이게 떠올랐는지, 아쿠아 알타, 강의 범람. 가을과 겨울에 이 도시는 물로 넘쳐 나고 언젠가는 완전히 물속으로 잠기고 만다...” (p.130) 다른 소설들이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는 범주 안의 사랑 혹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소설은 결이 다르다. 나의 부모가 등장하고, 나는 부모님이 이탈리아로 여행하고 있는 중간에 잠깐 만나고 헤어진다.

「뚜쟁이」

“우리는 달걀 껍데기 색이 칠해진 방 식탁에 앉아 토마토와 피망을 넣은 생선과, 쿠스쿠스와 샐러드를 먹으면서 포도주를 곁들여 마셨다. 요하네스가 카를로비바리에서 이런 이색적으로 보이는 식품을 어디서 구해 냈는지 꼭 알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커다른 도자기 접시에다 음식을 담아 먹었고 카라페에 든 와인을 따라 마셨다. 어디선가 외풍이 불어와 촛불이 깜박거렸고, 부엌에서는 아랍 사람들이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죽은 중국 여자의 접시, 찻잔과 컵에서 처음 느꼈던 구역질은 사라졌고, 나는 그녀의 양념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었고 그녀의 술을 마셨다. 중국 여자는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p.152) 이 문장 다음에 중국 여자가 ‘빨간 기모노’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작가가 기모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중국 여자는 살아 있는 여자가 아니다. “... 나는 줄 쳐진 종이를 봉투에서 꺼내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거미줄, 전자 회로, 마치 중국 수수께끼같이 얽히고설킨 모양. 나는 다른 사람들의 편지나 일기, 사적인 메모를 아무 가책 없이 읽는다. 아니, 솔직히 늘 꺼림칙한데, 어떤 결정을 내리려면 알아서는 안 될 사실도 알아내야 하기 때문에, 원칙과는 상반된 의무감에서 그렇게 한다...” (p.161) 나는 지금 요하네스를 방문 중인데, 나와 요하네스의 관계는 꽤 오래 지속된 편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내가 요하네스한테 반하였지만 요하네스가 시큰둥하였고, 나의 관심이 끝난 즈음에 요하네스가 나한테 빠져버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어정쩡한 친구 상태이다. 여하튼 모호하다, 이렇게... “... 나는 그의 옆에 누웠다. 나는 그의 배에 등을 대고 누웠고, 그는 팔로 나를 감싸며 내 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내가 더 이상 그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p.168)

「단지 유령일 뿐」

『...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의식할 수 없다는 걸 아이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네바다 오스틴에 있는 버디가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에 넌 태어난 거야. 우린 아이에게 운동화를, 완벽한 신발통에 든 작고 앙증맞은 운동화 한 켤레를 사 주는 게 어떤 건지 몰랐거든. 그가 옳았어, 난 몰랐고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싶었어. 정말 그게 어떤 건지 난 알고 싶었어.”』 (p.202) 엘렌과 펠릭스는 이제 아이가 있고 그 아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두 사람이 함께 떠난 미국 여행, 그 횡단 여행 중 사막의 한 복판에 있는 어떤 도시, 그 도시의 호텔과 바에서 만난 버디, 라는 인물이 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나는 루카스를 사랑하는데 루카스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루카스의 친구인 페터가 내게 빠져 있는데 나는 페터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페터와 함께 연말에 프라하로 가겠다고 결심한 그해 겨울에 미하는 사라를 사랑했다. 사라는 미하를 사랑했고, 사라를 사랑한 미로슬라브는 혼자 프라하에 살았는데 창문마다 달려 있던 블라인드를 항상 내려놓고 있었다. 덕분에 유일하게 배운 체코 말, ‘스무트나’. ‘스무트나’는 슬프다는 뜻이다...” (p.207) 그러니까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루카스를 생각하면서도 페터와 함께 프라하로 여행을 가는데 그곳에는 미로슬라브가 있고, 나와 페터와 함께 미로슬라브를 방문한 것은 미르슬라브가 사랑하는 사라 그리고 사라와 사랑하는 사이인 미하이다.


「아리 오스카르손에게 향한 사랑」 “나는 트롬쇠에서 방에만 있었다. 거의. 나는 구나르의 여관 방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체류의 장소이며, 게다가 세상이 지나가는 것을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난 어디든지 있을 수도 있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p.246) 나와 오언은 작은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하고자 노르웨이의 외딴 지역 트롬쇠를 방문하지만 페스티벌은 취소된 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곳의 여관에서 머물기로 하고 비수기인 그곳의 여관에는 카롤리네와 마틴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렇게 사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태도가, 우리가 문제없이 같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걸 나는 알았다. 상대방을 사랑할 그런 위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카롤리네는 오언을 사랑하지 않을 거고, 오언은 마틴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오언을 사랑하지 않을 거고, 그리고 오언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주 홀가분하면서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사랑의 부재가, 사랑의 가능성의 부재가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위로가 되고 홀가분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슬펐다.” (pp.251~252) 이후 네 사람은 페스티벌의 주최자였던 아리 오스카르손과 그의 아내 시카를 만나게 되고 밤새 진탕 마신다. 아슬아슬하게...

작가는 독일인이고 등장인물들도 독일인이지만 실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곳은 대부분 독일이 아니다. 프랑스,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체코, 미국, 노르웨이 등에서 살며 여행하며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랑의 감정은 내가 주로 머물고 있는 여기가 아니라 낯선 저기로 뛰어드는 감정이거나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를 생각하거나 저기에 있다고 믿는 어떤 감정일지도 모른다. 소설집의 내용은 대부분 사랑의 이야기인데 낭만적이기는커녕 피로할 정도로 건조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토록 열렬한 건조함도 사랑의 한 속성이다.


유디트 헤르만 Judith Hermann / 단지 유령일 뿐 (Nichts als Gespenster) / 민음사 / 2008, 20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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