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대한 예찬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은 산책주의자와 산보주의자로 나뉘어 투닥거리고는 했다. 무의미에 대한 예찬이 한창인 시절이기도 해서 우리는 이처럼 의미 없는 담론을 나누는 것을 즐겼다. 애써 떠올려보자면 산책보다는 산보가 더욱 느린 걸음인 것으로, 산보보다는 산책이 주변의 환경에 좀더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우기고는 했다. 물론 산책과 산보는 온전히 같은 말이다.
“시간에게 역사의 알리바이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은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탈주하는 방식으로 제 존재를 증명한다. 길의 이 기이한 자기 증명 놀이.” (p.22)
시인의 산문집 제목에 ‘산책’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어 반갑다. 더욱 반가운 것은 시인의 산책에 대한 경험에 홍대 앞과 명동이 들어가 있어서다. 나도 어느 한 때 홍대 앞과 명동을 걸었던 기억이 있어서이다. 아직 홍대 앞이 온전히 홍대에 재학 중인 이들의 앞이던 시절이었다. 아직 명동이 외국인이 아니라 온전히 내국인의 영역이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나는 매일매일 취한 채 그곳들을 걸었고, 취하려고 그곳들을 걷기도 했다.
“기억은 무덤이다. 무덤 맞다. 나는 명동에 나를 묻어두었다. 자꾸 거기 가고 싶다.” (p.127)
홍대 앞이나 명동은 이제 전국구를 넘어 범지구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때때로 홍대 앞을 나가기는 하지만 명동, 그러니까 오래전 서울예전이 있던 남산 아래 쪽으로는 발걸음한지 오래되었다. 대신에 최근, 그곳을 함께 걸었던 그때 그 시절의 지인을 만났다. 어쩌면 그때 그 시절의 남산 밑 명동과 비슷한 연남동 끄트머리에서였다. 어쨌든 책에서 ‘둘둘 치킨’이라는 명칭을 발견하고 혼자 반가웠다.
“계속 울던 날들이 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자신의 눈물이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달을 울었는데 9kg이 빠지고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내 먼 안쪽에 훼손되지 않은 고통과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p.33)
책에 등장하는 산책의 경로에는 장소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산책로에는 사람도 있고 시간도 있다. 그렇게 통합된 기억이 하나의 거대한 산책이 되고 있고, 책은 구불구불 골목이 잔뜩 있는 산책로가 되고 있다. 무심히 걷던 골목길, 그 골목길이 일단 멈춤인 지점에서 구십 도로 몸을 틀자, 갑자기 맞닥뜨리게 되는 것들의 풍광 또한 책은 오롯이 품고 있다. 주춤하게 되지만 곧 안도하고 다시 걷게 된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지만 자식은 애써야 한다는 것. 엄마는 평생 울타리로 서 있지만 자식은 울타리인 척한다는 것. 엄마는 세상에 온 내게 산책 길이 되어준 것이다. 엄마가 나의 산책 길이었다면 나는 참 모진 발로 걸은 사람이다. 엄마를 자주 숨막히게 했다. 울게 했다.” (p.184)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 나는 산책주의자와 산보주의자 중 산보주의자에 속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더 느리게, 그리고 걷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삶은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겠다. 불 꺼진 명동이나 손바닥만한 홍대 앞을 거닐던 시절로부터 너무 빠르게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제대로 지쳐가고 있으니 이제 다시 산보주의자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